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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an 25. 2024

멈춘 버스


정류장에서 멈춘 버스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서울행 비행기가 뜨기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말은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버스가 제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로 한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버스 기사가 뒤를 향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방!” 아저씨!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아저씨에게로 향했다. 나는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 한쪽을 빼고 상황을 파악했다. 아저씨의 뺨에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근원지는 머리였다. 머리를 크게 다친 게 분명했다. 버스 기사는 즉시 구급차를 부른 뒤 아저씨의 팔짱을 단단히 끼고 정류장 바로 옆의 보건소로 향했다. 하지만 보건소는 굳게 닫혀 있었고, 나는 재빨리 보건소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보건소장은 이미 다른 사람이 연락을 해서 구급차를 불렀다고, 지금은 출장 중이라 자신이 빠른 처치를 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평일 아침 버스라 대부분이 출근을 하는 듯했고, 그래서인지 전화를 걸어 버스에 사고가 생겨 늦을 것 같다는 말들이 군데군데 들렸다. 나도 수수료를 물고 비행기 시간을 미뤘다. 모두가 합심해서 이 아저씨를 도우려는 목적이라고 생각하니 평소라면 아까웠을 수수료가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인류애가 생길 무렵, 애정을 산산이 부서뜨리는 시작은 좌석에 앉아 있던 한 할아버지의 고함이었다.


“기사 양반, 어차피 그 아이는 여깃 아이라. 가족들이 지나가멍 볼 거우난 걱정 맙서.” 기사 양반, 어차피 그 아이는 여기 아이예요. 가족들이 지나가면서 볼 테니 걱정 맙시다.


할아버지의 생뚱맞은 말에 버스기사 아저씨가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꽈? 여깃 아이면 냅둬도 된다는 말이꽈? 저 예. 기사우다. 책임 있어마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 사는 아이면 냅둬도 된다는 말입니까? 저, 기사입니다. 책임 있어요.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거들었다.


“그 사람 원래 술 하영 먹고 다니는 사람이라. 딱 보니까 어디 강 넘어진 거 달믄디 구급차도 불러시난 출발합서.” 그 사람 원래 술 많이 먹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딱 보니까 어디 가서 넘어진 것 같은데 구급차도 불렀으니 출발하시죠.


이제 그만 출발하자는 서너 명의 아우성에 나를 포함한 버스 기사님과 사람들은 당황했다. 뒷자리의 어떤  젊은 사람은 “알코올중독자 하나 때문에 이게 웬 고생이야.”라며 커다란 목소리로 툴툴대더니 카드를 찍고 버스에서 내렸다. 배차 간격이 족히 삼십 분은 되는 시골이니 택시를 부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구급차가 오는 시간을 굳이 따지자면 오 분이면 될 텐데, 아무리 출근길이어도 그 오 분을 기다리지 않고 구시렁거리는 게 옳은 일인지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할 무렵 저 먼 반대편에서 구급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때였다. 주민센터 직원 분이 소란을 듣고 나오셨는지 자신이 인도하겠다고 걱정 말라며 이제 그만 출발하라고 일렀다. 버스 기사님은 재차 괜찮은지 확인했고, 주민센터 직원 분께 정말 괜찮다고 몇 번이나 답을 듣고서는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았다. 버스 시동 소리가 들려서야 하차한 사람도 다시 카드를 찍고 올라탔다.


이 일화가 마음에 남아 좀처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맞다고 확언할 수도 없고 툴툴대는 사람이 맞다고 확신할 수도 없어서다. 알코올중독자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에게는 이 상황이 지리멸렬하게 느껴져 “구급차를 부르는 등의 적당한 조치를 취했으면 더는 많은 사람들이 피해 보지 않는 게 옳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알코올중독자에 대한 편견을 미루고 사람이 다쳤으니 도와야 한다는 인류애적 입장으로 따지면 “그 아저씨가 잘 이송되게끔 옆에서 부축해 주고 물을 건네며 함께 기다리는 게 도리”다.


나는 후자였다. 비행기를 놓쳐 비행기값을 놓치는 일보다 한 사람의 안위를 챙기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으나 더 많은 피해가 초래되기 전에 그만 멈추고 다음 정류장으로 나아가자는 의견의 전자인 사람이 꽤나 많아 당혹스러웠다. 출발하자고 아우성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입 안으로 구르는 반박은 “사람이잖아요.” 뿐이었다. 하지만 구급차를 불렀으니 그들이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은 건 아니다. 더불어 늦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보상해 줄 수는 없다. 일반 차량조차 자주 지나가지 않는 황량한 시골의 보건소 앞에서 사비를 내어 택시를 불러줄 수도 없다. 도저히 어떤 게 정답인 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어찌어찌 달리는 버스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구급차를 보니 다행히 아저씨는 잘 이송된 듯했지만, 나는 더 이상 이 버스에 가만히 앉아 있을 자신이 없어 중간지에서 내리고 다른 버스로 옮겨 탔다. 툴툴대는 사람들과 한 장소에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이렇게나 복잡한 심경은 무엇인지, 조금 전 내가 겪은 일이 실제 일화이기는 한 건지 머리가 아팠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의견이 상충되는 사람들이, 가치관이 정반대인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니 오히려 이상한 쪽은 내가 아닌지에 대한 의심까지 들었다.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법칙은 여기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므로. 당연히 내가 맞다거나 당연히 그들이 맞다는 이야기는 함부로 할 수 없다. 존재라면 자신의 존재 밖의 존재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다. 게다가 피를 흘린 아저씨가 동네에서 소란을 자주 피우는 요주의 인물일 수도 있고, 짜증 내는 주변인들의 감정으로 보건대 어쩌다 행패를 부렸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 이제 그만 돌보자는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친절을 베푸는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이방인에게는 당연한 법칙이 그들에게는 당연하지 않게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사건을 떠올리며 툴툴대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구급차가 도착할 조금의 시간은 만들어두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바람에서 기원한다. 우리는 낯선 서로의 다정과 온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공황이나 불안으로, 혹은 몸이 아파 쓰러질 때 우리를 구하는 건 가족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모르는 사람의 온기다. 아픈 사람 하나 때문에 버스가 멈췄다고, 그래서 늦는다고, 짜증이 난다고,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물론 사람의 감정은 복잡다단하기에 설령 그런 마음이 불쑥 올라올 수 있다. 그래도 겉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자신이 쓰러질 때 구해줄 사람들이 근처에 있을 테니 보답하는 마음으로 미리미리 구하자는 뜻은 아닌데, 이런 내 의견까지 구태여 물어뜯을 사람이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 같아 문득 울고 싶다. 다정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을 믿는다. 다정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을 때 울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고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겠다. 할 말이 많아 삼키는 일은 이제 그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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