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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pr 13. 2024

다음으로 걸어갈 모래 언덕


영영 취업을 할 수 없으리라는 좌절감이 무색하게 집과 먼 거리에 있지 않은 회사에 들어갔다. 상담을 종결했다는 책의 말미에 쓰인 글과 다르게 직장을 다니면서 새로운 상담을 시작했다. 이번 상담으로 얻으려는 목표는 완고하다. 여러 이유로 일 년 이전에 달아난 회사를 이번만큼은 끈질기게 다녀서 마의 일 년을 넘기자는 거였다. 회사 동료와 얽힌 사소한 오해나 일을 하며 종종 느끼는 무력감을 선생님에게 털어놓았다. 덕분에 여러 처방전을 얻었다.


선생님은 자주 힘을 빼도 괜찮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만 잠시 애를 쓰며 힘을 뺐고 다시 월요일이 되면 오늘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업무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부담감으로 일을 대했다. 당연한 이치로 일이 잘 풀리는 날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날이 있었다. 일이 잘 풀리면 노력을 들였으니 나와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니냐며 스스로에게 칭찬을 건네지 않았지만,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비난의 말로 나를 자극했다.


이번에는 꼭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프로젝트가 잠정 중단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물밀듯 들려올 거라고 예상했던 북토크 소식도 잠잠했다. 열심히 일했고, 열렬히 썼지만 어느 보상도 오지 않는 듯한 무력감이 들었다. 백 장 가까이 준비한 피피티로 강의를 했지만 오랜만에 진행하는 강의인지라 마이크에 떠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만큼 떨었다. 자꾸만 헛발질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면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수긍할 만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누구보다 열과 성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일을 했고 주체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문 밖으로 들리는 인기척에 문을 열어준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커다란 보상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아무런 대답조차 듣지 못한다는 상상을 한 것도 아니어서 나는 자꾸만 작아졌다.


당장 다음 주부터는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막막한 게 사실이다. 입사하고 가장 큰 공을 들인 프로젝트에 더는 손을 쓸 수 없고, 다음 책으로 엮고 싶은 주제를 마땅하게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한가로운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애가 탄다. 조급해진 마음을 억누르려 억지로 따뜻한 물로 몸을 적시고 좋아하는 커피를 내리기도 했지만 어차피 해도 안 될 거라는 예측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주 회사에게서 더는 내 자리가 필요 없다고 나를 내보내는 소식이 들리면 어쩌냐는 마음 반, 출판사에 투고를 해도 모두 거절 당해 이번 책이 내 마지막 책이 될 거라는 속상한 마음이 반 정도 든다. 두 종류의 마음 중 어떤 마음도 반기기 달가운 마음은 아니어서 초심으로 돌아오기 위해 상념을 정리하려 글을 쓴다. 한 작가님의 댓글인 "쓰는 사람으로 나를 알고 나를 찾아가는 일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에서 힘을 얻었다. 목표를 바라보며 살지 않고 과정 자체에 의의를 두는 말처럼 다가와서 어깨에 들인 힘이 많이 빠졌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한자성어가 요즘 자주 불쑥 떠오른다. 하루하루 힘차게 살았지만 결과가 도통 마음처럼 나오지 않을 때, 그래서 회사 사정이 어려워 사직 통보를 받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에는 손을 떼고 다음 계획을 짓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는 의견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은 괜히 붙잡아봐야 더 달아나기 일쑤다. 잡히지 않는 신기루를 잡는 것보다 다음으로 걸어갈 모래 언덕을 정하는 게 자책과 후회에 붙잡히지 않는 방법이다. 한참이나 걷다 보면 그토록 바라던 오아시스가 나올 수도 있고 다시 신기루임이 드러날 수도 있다. 고심하며 고른 모래 언덕이 사실은 잘못된 방향임을 아는 건 또 다른 후회를 불러일으키지만, 여기서 계속 후회만 하다간 목만 바짝바짝 마를 가능성이 있다.


매 순간 보상을 맞닥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그래도 희망은 완전히 놓지 않고 어렴풋하게 지닌 채 다음 모래 언덕을 고른다. 이번에는 일 년도 거뜬히 마실 수 있는 거대한 오아시스가 나왔으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체념을 한다. 언젠가는 모래 언덕을 오르는 현재의 성취감에만 몰두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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