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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pr 25. 2024

지면 어떡해?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해 자꾸만 선생님의 ‘선’이 튀어나온다는 스무 살 막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토론 수업인데,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어?"


막내는 질문 말미에 "대졸 선배에게 묻습니다"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붙였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도 나는 이기고 싶은데. 지면 어떡해. 그리고 그것도 걱정이야. 상대편 말을 들었는데 내가 넘어가면 어떡하지?"


나는 이기고 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의견이든 귀담아듣고 가끔은 설득당하기도 하며 결론만 밀어붙이지 말고 생각이나 가치관의 틀을 넓혀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때로는 잔소리처럼, 때로는 설교처럼 들릴만도 한데 막내는 꿋꿋하게 내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한 마디를 던졌다.


"졌잘싸네."

"그렇지. 졌지만 잘 싸운 거."


유행하는 밈을 써서 한 단어로 압축한 게 웃겼지만 나름 내 이야기를 잘 해석한 것 같아 기분 좋게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방금 입으로 이야기한 것처럼 져도 괜찮고 이겨도 괜찮은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는지 살폈다. 그렇지 않았다. 혼자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며 고요한 경쟁을 펼쳤고, 어떤 문제든 슬기롭게 잘 헤쳐나가야 경쟁 사회에서 몫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아득바득 하루를 견뎠다. 남는 시간을 일에 투자하니 업무도 익숙해지고 일 자체도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지만 갑갑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열심히 뛰는 기분이었다. 옆을 둘러봤지만 같은 편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외로웠다.


정규직이든 경력직이든 거의 모든 기업에는 수습 기간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올 초, 신년이 되자마자 한 회사에 입사했고 이번에는 반드시 일 년 이상을 다녀보겠다며 어떤 일이든 열렬히 임했다. 특히 단거리로는 삼 개월을 바라봤다. 동료들의 평가가 기다리는 수습 기간을 넘겨야만 일 년이고 삼 년이고 다닐 테니 우선 삼 개월부터 잘 지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 싫은 날에도, 자꾸만 감기는 눈 때문에 눈을 감은 채 회사로 출근하던 길에도 지문을 찍고 회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정신을 차렸다. 조금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격을 충족하지 못할까 봐. 저번처럼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진다면 대출을 받아야 할지도 모를 통장 잔고가 두려워서 더욱 열과 성을 다했다.


다행히 삼 개월이 지났다. 기다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불안한 기분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회사 분위기가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 않았다. 예감은 적중했고 나는 이번 주 월요일에 대표와 면담을 했다. 커피를 마시던 아침이었다. 오전이니 맑은 상태로 회의실에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무거웠다. 분위기를 밝게 전환하려 일상 이야기를 해도 번번이 실패했다. 해고였다. 수습 기간을 버텼고 동료들의 평가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삼 개월이라는 단거리 마라톤을 끝냈더니 나를 기다리는 건 해고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가혹해서 정신없는 나는 어느덧 인사팀에게 이번 달까지만 하겠다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한 달은 더 다니고 싶었지만, 어차피 여기 다닐 수 없는 거라면 여유롭게 좋아하는 기업을 찬찬히 둘러보며 이직 준비를 하고 싶었지만 이 주 안으로 퇴사 일자를 정해주면 좋겠다는 말에 열흘로 골랐다. 굳이 새로운 달까지 퇴사일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기뻐해야 할 일인 건지 회사는 내게 다른 일을 시키지 않는다. 계약직으로 일하던 다른 회사에서의 일화와는 다르다. 그때는 퇴사일자까지 인수인계부터 프로젝트 마감으로 바빴는데 이번에는 내가 맡은 프로젝트가 엎어진 탓에 인수인계를 할 대상도 없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살금살금 이력서를 썼는데 지금은 당당하게 쓰고 있다. 나는 여전히 다니고 싶었지만 잘린 상황이니까 회사도 내게 무어라 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속이 상했다. 진 기분이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아니라 노선을 바꿔야 했나. 때로는 이 길이 맞는지 자문해야 했나. 수습만 버티면 커리어가 창창하게 펼쳐진다고 믿은 내가 잘못한 사람 같았다.


그런 와중에 막내에게는 져도 괜찮다고, 이기고 지는 싸움이라는 건 없고 잘 들어주고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던 내가 조금은 부끄러웠다. 말한 대로만 살고 있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막내가 압축한 세 글자를 읊었다. 말 그대로, 졌지만 잘 싸웠다. 그리고 내 말을 얹혀서, 져도 준비한 대로 잘 진행했으니 울적해할 필요 없다.


어디선가, 예측 못한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부정이 아니라 수긍이라는 말을 들었던 걸 기억해 냈다. 오늘, 아니 내일까지는 더는 자책 말고, 상황도 부정하지 말고 빠르게 받아들여야지. 그런 다짐을 하며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하던 대로. 져도 괜찮아. 잘 듣고 이야기하고 오면 돼. 면접은 끝났고, 결과가 어떨지 섣불리 예측하기란 어렵지만 삼 개월짜리 단거리 마라톤을 할 때보다 확실히 후련해진 걸 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쪽으로 가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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