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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사람 Jul 25. 2020

내 나이 서른하나, 둘, 셋

인생에는 누구나 살면서 참고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들이 있다.

유인경 기자가 경향신문의 여자들의 수다칼럼에 ‘고통총량의 법칙’에 대해 써놓은 글을 읽은적이 있다. 모두의 인생에는 평생 감내해야 할 고통의 총량이 있고 그 양은 누구나 똑같으며 50년의 삶과 30년의 기자생활을 한 그녀가 확신하건데 대통령이든, 재벌이든, 종교지도자든 이 고통총량의 법칙에서 벗어난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 한다. 학창시절 잘 나갔지만 결혼 후 남편과 자식 때문에 고생하던 그녀의 친구, 보잘 것 없는 남편과 결혼했지만 결혼 후 남편의 사업이 잘되어 생활이 풍요로워진 두 친구를 예로 들며 그 고통총량의 법칙에 대해 얘기를 했다. 삶에서 사람마다 감당해야 할 고통의 총량이 정해져있다면 그것을 언제 겪는지 그 ‘때’라는 것이 문득 궁금해진다. 사전적 의미로는 몸이나 마음의 아픔이나 괴로움을 뜻하는 고통은 여러 가지 형태로 찾아온다.

 

나에겐 정말 친했던 친구가 두 명이 있었다. 한명은 대학교를 함께 다니던 학과친구였고 다른 한명은 고등학교 친구였다. 학과친구는 노래방을 몰려다니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던 아이였는데 내가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해서 원하는 회사에 두 번이나 들어가는 동안 친구는 1년 반을 백수로 있었다. 그 시간동안 스펙을 쌓기 위해 전공과는 무관한 전자상거래 관련회사에 들어가 급여를 받지 않고 일을 배웠고 토익공부도 열심히 해서 800대 중반의 점수를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준비해서 친구는 A라는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취직을 했다.

이력서에 넣을 스펙 한 줄을 만들기 위해 무보수로 일하고 취업하기 위해 쏟은 시간과 돈, 노력이 허망하게 스물다섯에 친구가 했던 일은 서빙하는 일이었다. 힘들게 스펙을 만들어놓고 서빙을 하는 친구를 보며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내가 낫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직장에서 원하는 대로 일이 안 풀려나가면 점집을 찾아다니며 사주를 보고 거기서 하라는 대로 굿 비슷한 것을 했다. 오직 나의 의지만 믿었던 나는 친구의 그런 모습이 못나게 느껴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 그만큼 잘 해나가고 싶은 의지가 강했고 원하고 욕망하는 만큼 노력했고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서 정성을 들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친구가 서른을 맞이할 무렵 위 상사가 갑자기 퇴사를 하면서 그 카페의 총 관리자가 되었다. 서른 살에 과장이 되고 그 후 계속 승진하여 서른여섯에 부장이 되었다. 삼십대 중반에는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끊임없이 노력해서 그녀가 원하는 일, 사랑, 가정 모든 것을 이루어 냈다. 서른일곱에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백수로 있었던 한 달 동안은 모든 것이 안정되고 행복한 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에겐 고통이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를 닮은 고등학교 친구는 몸매도 글래머러스해서 남자들에게 항상 인기가 많았다. 스무 살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언니와 둘이서 자취를 하며 낮에는 피아노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영어강사가 되기 위해 밤에는 편입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부모님의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서 등록금 및 월세를 포함한 생활비를 친구와 친구의 언니가 함께 감당해야 했고 그런 상황을 힘들어하며 우울증 약을 먹기도 했다.

함께 옷을 사러 명동에 나가면 친구는 옷 한 벌을 사는데도 몇 번을 고심해보고 골랐고, 나는 입고 싶은 옷은 모두 사서 입었다. 직장을 다니고 있었으니 내가 번 돈으로 옷을 사 입고 공연을 보러 다니고 여행을 하며 사는 나를 보는 것도 그 친구에겐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통화를 하다가 가벼운 말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날 이후로 나와 연락을 끊어버렸다. 매일 만나고 매일 연락하던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등을 돌리자 힘들었던 나는 그제야 나를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그 후 서른한 살 무렵에는 결국 원하던 영어강사가 되어 돈도 많이 모으게 되었고 집도 구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른두 살이 되던 해 그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문자로 연락을 해왔지만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취업과 집에 대한 걱정을 해본 적이 없이 자유롭고 넉넉한 이십대를 보냈던나와는 다르게 내 친구들은 격정의 이십대를 보냈다. 그 당시에 나는 친구들이 했던 고민들을 깊게는 알 수가 없었다. 처해보지 않으니 알지 못했던 것이다.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보며 그래도 나는 살 만하다는 상대적인 위로감만을 느꼈다.


나의 고통의 시간들은 내 나이 서른하나, 둘, 셋에 찾아왔다. 2년간 준비했던 해외취업에 실패후 들어간 회사는 참 이상한 조직이었다. 미국교포 사장과 부사장이 있었고 총괄이사가 한명 있었다. 그 아래로는 영업을 하는 남자직원 한명과  고객응대를 하는 여직원 두 명, 그리고 경리부 여직원이 한명 있었다. 입사하자마자 입사 턱을 내라고 해서 홍대의 한 고기 집에서 십만 원어치 저녁을 샀다. 직원들보다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과거의 경력을 인정해줘서인지 대리라는 타이틀을 주었다.

하는 일은 부사장과 총괄이사의 비서겸 업무지원 이었다. 체계가 잡히지 않은 작은 조직이라서 이것저것 모든 일을 다 해야 했다. 은행에서 10년 넘게 일을 했던 총괄이사는  어떤 회사든 돈의 흐름만 알면 운영할 수 있다고 말하며, C회사 같은 큰 조직에 몇 년을 다녀도 배우지 못할 것들을 여기서는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때는 월급을 받으며 일을 배운다고 생각할 만큼 일에 대한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이것저것’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 좋았다.

직원들은 둘째 날부터 나를 경계 했다.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가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고 먼저 인사를 해도 대답하지 않거나 눈인사만 까딱하는 정도였다. 고객지원팀 선임은  내가 자리로 가서 앉기가 무섭게 내 자리로 와서는 스파르타식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위압적인 분위기로 핀잔을 주며 일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다른 여직원과는 둘이서만 점심을 먹을 일이 있었는데 밥을 먹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몇 마디를 붙이면 그때서야 형식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총괄이사는 어떤 날은 출근을 하면 계약서 16장짜리 번역을 시켰는데 업무 중에 다 마치지 못해서 집으로 들고 와서 끝내고 제출을 했다. 총괄이사의 자리는 내 뒷자리였고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다 보고 있다가 잠시라도 딴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으면 바로 회의실로 불러들여서 한참동안 훈계를 했다. 늘 감시받고 있는 기분이었고, 나는 항상 뭔가를 잘못 하고 있는 것처럼 주눅이 든 채로 회사생활을 했다.

오후 8시가 넘어 퇴근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새벽 한 두시까지 사무실에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하루는 총괄이사가 퇴근 후에 술 한잔을 하자고 했다. 술자리에서 또 훈계가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내가 너무 ‘내 속’을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관리’라는 명목 하에, 직원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 했다.


  회사는 계속 커지고 있었다. 그 해 9월 영업이사 한명과 고객지원팀 직원 한명도 더 들어왔다.   새로운 영업이사는 나에게 담배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태어나서 담배심부름을 처음 해봤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경력을 쌓고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할 때까지는 무조건 참고 버티겠다고 다짐했다. 직원혜택도 복지도 하나 없이 고된 노동으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회사를 다니면서 먹고사는 일이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추석휴가가 끝난 10월에 총괄이사가 회사가 자꾸 커지고 있으니 영업을 더 중점적으로 할 직원을 뽑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다른 할 일을 알아보라고 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여기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10개월 동안 모아둔 돈을 다 들고 영국행 비행기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7개월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회사생활을 할 자신이 없어서 초등학교 원어민 영어교실 강사로 커리어의 방향을 틀었다. 원어민 영어교실 강사를 하던 2년 동안에는 강사로서의 나의 자질과 능력을 키워나가고 싶어서 테솔과정에도 등록을 하여 6개월간 일과 자격증 반을 병행하였다. 낮에는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테솔과제를 하고 주말에는 수업을 들었다. 엄마에게 부탁해서 마련한 비싼 등록금이었기에, 반드시 자격증을 따고 무사히 수료를 해야만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어두운 터널 속을 나 혼자 걷는 느낌이었다.


서른셋이 되자 삶에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오는 듯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두 명의 원어민 강사와 한명의 선임강사와 함께 아이들에게 즐거운 영어교실을 만들어보고자 열심히 수업 아이디어를 짜내고, 수강생 모집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좋은 실적이 나왔지만 그 공은 학교의 책임자였던 선임 강사에게 모두 돌아갔다. 최선을 다하는데 이번일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마음이 자꾸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중국의 극동지방에서만 자란다는 ‘모소 대나무’이야기가 있다. 농부들은 이곳저곳 씨앗을 뿌려놓고 정성을 들여 대나무를 키운다. 씨앗에서 싹이 트고 수년 동안 정성을 다하지만 모소 대나무는 4년이 지나도 3cm밖에 자라지 못한다. 하지만 5년째 되는 날부터는 하루에 30cm가 넘게 자라기 시작한다. 6주 만에 15m이상을 자라고 순식간에 울창한 대나무 숲이 완성된다. 4년 동안 3cm밖에 자리지 못했던 모소 대나무는 이 기간 동안 땅 속으로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앞을 보며 달렸던 내 나이 서른하나, 둘, 셋에 나는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돌아보면 이 시간들만큼 나를 성장시켰던 시간들은 없다. 그 때까지 실패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어서 오만했던 나에게, 삼십 대 초반의 실패와 방황의 시간들은 내가 더 성숙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 준 하늘이 주신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을 견디어내며 타인의 아픔에도 귀 기울이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고, 겸허한 사람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이 주어진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참고 버티어 낸 그 시간들은 가치가 있다. 인내 없이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가 없으니까...

때가되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그 땅에서 당신만의 꽃이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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