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규범과 이혼에 대한 소고
나혜석 언니가 자주 생각나는 요즘이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인식은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을 꿈꿨으면서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의 작은 결정 하나로 삶이 자주 무너진다. 어딘가에 나와 같이 삶에 대한 자기 결정을 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이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각자도생 하면서 괴로움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이것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말과 행동의 비주체로, 대상으로 인식되기를 거부하는 몸부림이다. 나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가리어지지 않도록 드러내려고 한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존재를 스스로 갉아먹으며 파괴하는 일을 멈추지 못할 것 같은 나로 사는 삶을 멈추고 싶지 않은 나의 생의 의지이다. 또한 어딘가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외로운 우리들에게 때때로 고통스럽지만 멈추지 말자는 다짐인 동시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고통에 대한 연대의 편지이다.
결혼 11주년 기념일이 지난 어느 날 K에게 이혼 서류와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너무 오래 걸렸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건 K가 착하고 가정적이며 책임감 있는, 일반적으로 훌륭한 남편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그는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남편이었으며, 나는 전통적인 아내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개차반 아내였다. 그래서 K와 이혼해야겠다는 나의 결정은 이기적인 것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나 역시 그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고 (K의 성에 차지는 않았겠지만) 나름대로 애를 쓰며 살았다. 내 삶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하겠다고 드디어 마음을 먹고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혼을 말하고 모든 법적 절차가 끝나기 전까지 나는 홀가분한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으로 충만했었다. 두 달여 지난 지금 나는 사회적 시선이라는 또 다른 벽을 마주하고 있다. 이 벽을 무사히 넘을 수 있을까.
여성에게 자기 삶을 결정하는 권리로서 이혼은 의미화되지 않는다. 가부장제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행복의 토대를 거부하는 여성은 수용되지 않는다. 여성의 이혼이 허용되는 범주는 남편의 폭력 같은 범죄의 성격을 띨 때나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이혼에 있어서 여성의 주체성은 용인되지 않는다. 여성에게는 이혼마저도 수동성이 강요된다. 그래서인지, 가까운 친구들도 내 이혼에 대해서 K의 관계에 대한 서툶을 이야기한다. 그의 관계에 대한 서툶이 이혼의 원인이고 나의 이혼 결정은 K 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말들이 불편하다. 그건 뒤집어 말하면 K가 서툴지 않았다면, 좀 더 노력했다면 나는 이혼을 결정할 수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물론 K가 애정과 사랑의 마음에 대한 표현이 서툴고 진지하고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기는 하다. 그런 부분이 나의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의 이혼 결정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K의 결함 때문에 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의 이혼 결정은 내가 K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나름대로 애써왔지만, 그 애씀이 오히려 내 존재를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존재를 훼손하는 일을 그만둔 것이다. 한동안 내게서 사라졌던 생의 의지가 조금씩 생겨났기 때문에, 생의 의지에 힘입어 한 결정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혼 결정을 한 내가 대견했다. 이제야 비로소 나를 무너뜨리는 일을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K는 멘토인 L이 "아내는 화분 같아서 물을 주기적으로 주고 살펴야 한다"는 말을 듣었고 그 말을 내게 전하며 후회와 자책의 마음을 전했다. 답답했다. 내가 생각한 결혼은 연리지 같은 것이었다. 각각의 나무로 자라면서 서로를 살피고 돌보면서 하나이면서 둘인 그런 연리지로 살아가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한 사랑의 관계였다. 화분이라니. 사랑의 관계에서 남성을 주체로, 여성을 주체의 대상으로 여기는 K의 멘토 L에게 화가 난다. 그러고 나니 나와 K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더욱 명확해졌다.
이혼을 말한 것이 처음도 아닌데 K는 꽤나 당황스러워했다. 지난 11년 동안 내가 전했던 관계의 끝에 대한 말들은 사랑과 관심을 주세요라는 징징거림으로 다르게 전달되었다.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나의 말은 언어로서 기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니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서류를 접수하고 나서도 K는 자책과 후회를 담은 편지를 건네면서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다. 최종적으로 각각의 이혼 의사를 확인하기 위한 출석일이 다가오자 K는 절대 나가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은 편지를 직장으로 보냈다. 머리가 하얘졌지만 간단하게 문자로 답했다. 관계라는 게 만남에서는 두 사람의 결정이 필요하지만 헤어짐은 둘 중 한 사람만 끊은 놓으면 끊어지는 거라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끊어졌다고. 소송으로까지 가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고. 소송의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K는 나의 말을 언어로 의미화했다.
K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대상화했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K, 너의 세계에 갇히고 싶지 않다고, 그 세계로부터 빠져나오겠다고 선언하며 우리의 관계는 이제 끝이 났다고 통보하는 나에게 온통 자기반성으로 가득 차 새로운 다짐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이혼의 수용이 K가 나를 남성 주체와 동등한 존재로 여긴 첫 번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