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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 Jun 19. 2020

왜 이혼을 하느냐고요?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며칠 전 친구의 아버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장례식장에 가는 길에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K의 멘토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가 이혼에 관한 편지와 서류를 K에게 내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이혼을 말리려고 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그분과 나는 어색하게 테이블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어쩐지 나를 비난하는듯한 나를 불편해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은 외부의 시선이기도 하지만 내 내부의 시선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인식해왔다. 욕심이 많고 뭐든 잘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나는, 유별난 아이였다. 아빠는 그런 나를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내 거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헌신적인 사람이었지만 나에 대해서 종종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이라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엄마는 나를 보면서, “그래, 여자도 자기 할 일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능력 있으면 결혼할 필요 없어.”, “집안일 같은 건 애초에 배우지 않는 게 나아”와 같은 말을 하면서도 늘 걱정스러워했다. 그 걱정의 이면에는 여성은 헌신적이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 이어야 한다는 한국사회의 오래된 집단의식 같은 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나를 향한 이중적인 마음은 내가 나를 보는 시선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나는 내 욕구에 충실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긍정하기보다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라는 인식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혀왔다.


그래서였을까. 어떻게든 나의 마음을 되돌리려 애쓰던 K의 태도가 법적으로 서류가 정리된 이후 냉랭하고 사무적으로 달라지고 그렇게 나에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던 K의 멘토가 연락을 뚝 끊어버리니까, “넌 역시 이기적이고 못됐어”라는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K의 멘토는 만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언제나처럼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K의 멘토와의 어색한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와 K의 이혼이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를 아는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하는 일이 나의 미래가 될 것만 같아서 한참을 울었다.


종종 사람들이 나를 위로한답시고 K의 단점을 읊는다. 그럴 때마다 불편하다. 누가 누구를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있을까. 나도, K도 한없이 모자라고 부족한 게 많은 그런 존재다. 그뿐인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의도치 않게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해를 입힌다. 그러므로 나는 K가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이혼한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K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문제는 애를 쓰면 쓸수록 내가 지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이혼을 선택한 이유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삶에서 겪는다. 결혼과 이혼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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