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바깥을 비정상으로 소외시키는 사회
요즘 꿈을 자주 꾼다. 어제는 꿈에서 K와 다시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상처만 받았다. 괴로운 상태로 잠에서 깼다.
불안하다. 이혼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내 삶으로 증명해내야 할 것만 같다. 그래야 이혼이 내 삶의 실패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혼을 말하는 여자가 행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여성의 삶, 적당한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과 아이를 돌보는 삶, 그 전형성에 벗어나 있는 나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사라 아메드는 그런 <행복>은 지배 이데올로기이며, 지배 집단이 만들어 낸 <행복>이라는 이미지에 스스로 얼마나 가까운가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 전형성의 틀 안에 개인을 욱여넣으려고 함으로써 개인을 억압한다고 말한다.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정상 바깥의 존재를 소외시키고 우울증적 기억을 갖게 한다는 거다. 사라 아메드는 이것은 폭력의 역사와 차별의 경험이 정서적으로 고착화되는 과정이며, 동화를 강요하는 지배권력의 욕망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그는 '퀴어는 행복할 수 없다.'는 담론은 이성애 중심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설명한다. 이성애자가 행복하려면 퀴어가 불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요즘 내가 하는 생각과 닮아있다. 이혼한 나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은 어쩌면 결혼을 정상적 삶으로 여기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혼하고 애를 낳고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제도 바깥의 사람들은 불행해야 한다는, 그러므로 이혼한 사람은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근거 없는 생각에 나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그러면서 소외된 정서를 느낀다.
나는 안다. 한국사회에서 정상인, 그래서 행복하고 안전한 여성의 이미지는 특정한 존재 양식으로 정형화 되어있음을 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정상인 그리고 안전한 여성의 범주 바깥에 서 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탈출하고 싶어 했던 때도 있다. 일부러 남자애들이 하는 놀이에 관심을 가지고, 여자애들은 한 명도 없는 과학반에 들어가고,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다. 꾸밈 노동에 대해서는 무조건 거부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랬다. 그건 여성의 차별을 감각적으로 느꼈던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버리려던 애씀이었다.
그러다 대학에서 우연히 들은 여성학 강의에서, 자기 몸에 대한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 여성 운동이 모든 여성이 남성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몸을 가꾸고 꾸미는 것이 전형적인 여성의 틀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성학 강의를 맡았던 강사는 두 아이를 낳은 40대 초반의 여성이었는데, 긴 파마머리에 짧은 치마, 그리고 힐을 신었다. 그 모습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마 그즈음부터였을 거다. 전형적인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것, 선호하는 것이 오롯이 나로인해서만 만들어졌을 리는 만무하다. 나라는 존재 역시 사회문화역사적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므로, 그 속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는 이미지를 내면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여성의 이미지를 수용하기도 했고 거부하기도 했다. 때때로 두려워했지만 언제나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내가 순전히 원하는, 혹은 순수한 나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무사유의 상태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사유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이혼은 결혼의 실패라는 틀에 갇혀있으면서도, 실패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다. 이혼녀에 대한 외부의 시선만큼이나 나를 비난하는, 불행으로 밀어 넣으려는 내부의 시선 때문에 혼란스럽다.
사라 아메드는 정서적 소외를, 고립감을 느끼고 외로운 상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욕망이며, 소외된 정서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이며, 스스로 단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소외된 정서는 차별적 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힘이라고도 말한다. 이것은 내가 느끼는 정서적 소외를 나 자신을 불행으로 밀어 넣는 데 사용하는 대신, 사회의 차별을 읽어내는 눈으로 방향을 전환하라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