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시 Jul 26. 2020

그를 닮아가는 건, 나를 잃어가는 일이었다

특별히 약속이 없는 나의 일요일은 이렇다.


일단 잘 수 있을 때까지 실컷 잔다. 일어나서 화분에 물을 주고 행잉 플렌트를 물에 담가놓은 뒤 청소를 한다. 혼자 사는 집이지만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선반이나 책장을 손걸레질하고 화장실 청소까지 하고 나면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난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서 샤워를 한다. 그리고 나면 어쩐지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그리고는 마실거리 하나와 읽을 책을 들고 열한 살 노견과 건물 4층의 정원으로 간다. 나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노견은 잔디밭 사이사이를 탐색하거나 가끔 날아오는 새들을 쫓는다. 이제 제법 나무에 초록이 많아져 나무 사이에 숨으면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닫힌 공간이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나도 바람과 햇빛을 느끼며 책을 본다. 그러다 노견이 집으로 들어가자는 신호를 보내면 집으로 가서 드라마를 보면서 밥을 먹는다.


이 특별한 것 없는 일에서 평화로움을 느낀다. K와 함께일 때는 왜 느끼지 못했던 걸까.


K는 직업의 특성상 일요일이 더 바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일요일에 자신의 일터에 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도 그게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 아침이 바빴다. 충분히 잘 수 없었고, 대충 아침을 챙겨 먹고 K의 일터에 갔다. 약간의 대인기피가 있는 나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 겨우 시간만 채우고 도망치듯 나왔다. 그렇게 그 공간을 빠져나오면 외로움이 나를 덮쳤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나의 일요일은 왜 이래야 하는지 슬펐다.


그곳에서 탈출하고 나면 익명의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쓸쓸했지만 그 때가 제일 좋았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쓸쓸함이 극대화되면 걷잡을 수 없는 우울의 상태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일요일 오후 나는 대개 서촌 공방엘 갔다. 공방 가는 길에 혼자 미술관에 들르기도 하고 카페에 앉아서 잠시 쉬기도 했다. 공방 마치는 시간에 누군가를 불러내어 만나기도 했다. 일요일에 마음 편하게 집에서 쉬는 일을 잘 하지 못했다.


그때에 집은 무기력한 장소였던 것 같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따뜻하고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버려두는 그런 장소였다. 왜 그랬을까.


특히 일요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건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마도 K의 눈치를 봤던 것 같다.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가 않아서 K가 원하는 아내가 되지 못했다. 미안했다. 나라고 K가 바라는 모습이 왜 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잘 안 됐다. 쉽게 동의되지 않았고 때때로 폭력적이라고 느껴졌다.


K와 연애할 때 나는 K의 전공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많았다. 논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공이 직업이 되자 많은 게 달라졌다. 내 신념과 다른 역할을 요구받았고 그걸 거절할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겉으로 K는 내 선택을 존중해주었지만 서운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렇게 나는 언제나 나쁜 아내가 되었고 K는 자신의 직장에서 얼마큼의 불편함과 불이익을 감수하는 대단한 남편이 되었다.


늘 나는 나를 자책했다. K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들어줄 수 없는 나를 미워했다. 적절한 타협점을 찾으려고도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그건 나를 부정하는 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를 닮아가는 것이 나를 잃는 것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가끔 친구들이 얘기한다. 자기들도 남편이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냥 산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서라기보다는, 그의 틀에 나를 끼워 맞추려는 노력이 내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 같았다고 설명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답답했다. 그러다 <너무 다른 널 보면서(김동률 작사 작곡, 이소라 노래)>를 듣다가 다음부턴 긴 설명 대신 이 노래를 들어보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믿음조차 무색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겠지만
늘 모든 건 변한다고 하지만
나 여기 이대로 서 있는 걸
이제 너무 다른 널 보면서
나 미처 몰랐던 널 알게 된 거라
생각하면서 너에게 다가가도
너를 닮아가는 건 나를 잃을 뿐인데
그냥 여기서 널 기다릴게


그랬다. 그를 닮아가는 건 나를 잃어가는 것이었고 나는 나를 잃지 않고 싶어서 멈추었다. 나는 잃고 싶지 않은 내가 뭔지 모른다. 다만 내 존재가 조금씩 사라져 가는 걸 지켜보는 게 힘들었을 뿐이다. 많이 늦었지만 내가 지키고 싶었던 나를 지금부터라도 찾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혼하는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