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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 Aug 21. 2020

폭력의 가능성으로서 확신

몇 주전에 강릉에 다녀왔다. 한창 바쁜 시기이지만 여름휴가를 안 가면 어쩐지 신세한탄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친구 한 명을 졸라 강릉에 가기로 했다. 강릉과 주문진에서 보낸 4일이 좋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어째서 나는 첫날 강릉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눈시울을 붉혔던 그 시간과 마지막 날에서야 반짝하고 나타난 햇빛에 반가워 경포해변에 앉아 볕을 쬐며 멍 때 리던 그 시간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강릉에 살고 있는 친구 Y는 강릉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이사를 왔고 그러다 어느 때인가 강릉으로 귀향을 선택했다.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기꺼이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자신의 삶을 누리며 살았다. 멋있었다.


나는 늘 귀촌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쥐고 있는 것들을 놓지 못해서 지금도 도시생활을 한다. 말만 그럴싸하게 할 뿐이다. 그런데 반해 Y는 조용히 자신의 삶을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가꾸었다. 그래서 나는 Y를 동경한다. 욕심 덩어리인 내가 결코 하지 못할 일을 Y는 했다.


Y가 강릉으로 간 이후 나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강릉에 꼭 간다. 강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냥 Y를 만나고 싶어서 간다. 언젠가는 Y가 고등학생 때 자주 가던 떡볶이집엘 데려간 적이 있는데, 가끔 그 떡볶이가 생각이 난다.


이번에 강릉에 갔을 때에도 Y를 만났다. 고즈넉한 시골길에 예쁘게 지은 집이 식당인 곳에서 내리는 비를 창밖으로 구경하며 밥을 먹었다.


가기 전에 Y에게 빅뉴스가 있으니 기대하라는 말을 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미뤘던 이혼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Y는 나의 빅뉴스가 임신 또는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결혼할 때부터 출산과 육아에 대한, 생명을 책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이는 낳지 않겠다던 나였으므로 임신 정도는 돼야 빅뉴스일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게 아니라면 이혼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결혼에 대한 회의감, 제도가 가진 폭력성을 못 견디겠다는 나의 말 때문이었다고 했다.


Y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 나의 빅뉴스가 이혼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Y는 그래서 지금 괜찮냐거나, 왜 그런 선택을 했냐거나,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거나, 부모님은 아시냐거나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만 했다.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다.


Y와 나는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다. 어쩌면 그래서 서로의 어떤 점을 동경한다. 내게 없는 게 Y에게 있고 Y에게 없는 게 나에게 있다. 서로 다르지만, 그렇지만 Y는 자신의 틀로 나를 재단한 적이 없다. 그래서 Y에게는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다.


Y는 겸손하다. 자기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Y와 있을 때 안전하다고 느낀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카롤린엠케는 <혐오 사회>에서 증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확신에 찬 사람을 불편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나 보다. 아무튼 어떤 것도 자신의 틀 안에 가두지 않는 Y에게서 늘 배운다.


Y와의 만나서인지 조금 용기가 생긴 나는 강릉에서의 마지막 날, 전기차 충전을 하는 한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반려견과 사람 많은 경포해변 모래바닥에 철퍼덕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가, 사람을 구경하다가, 책을 읽다가, 사진을 찍으면서 땡볕에서 시간을 보냈다. 눈치 보지 않고 한껏 누린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 아니다. 가끔씩 나를 흘끗 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름휴가철에 여자 혼자 경포 바닷가 모래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았다. 나 말고는 가족 아니면 연인이었으니까.


이혼이라는, 흔히 보편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고 나니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자신의 틀로 누군가를 재단하는 게 불편해졌다. 그게 불편하면서도 두렵다. 그들의 틀 바깥의 나에게 씌워질 낙인이 두려워 아직도 나는 일터에서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이혼 사실을 숨기고 있다.


나도 한 때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한 것을 자신 있게 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확신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을까 싶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어쭙잖은 공부 조금으로 나댔던 시절이 부끄럽다. 그리고 그런 나의 확신 때문에 상처 받았을 이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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