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10월 아기랑 삿포로 # 4
안타깝게도 여행 전부터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던 콩은 셋째 날이 되자 기침이 심해졌다. 진지하게 귀국을 고민하던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처지지 않고 날아다니는 콩을 보며 혹시 몰라 챙겨 온 상비약을 먹이고 이튿날까지의 일정을 완수하기로 결정.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조마조마하고, 여행이 시작된 후에도 늘 변수 투성이다. (미혼 때 내일이 없을 듯 놀러 다닌 나 칭찬해)
다들 알고 있는 팁이겠지만 삿포로에서 오타루를 갈 때는 오른쪽(열차 진행방향 기준) 돌아올 때는 왼쪽에 앉아야 바다뷰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사실 막상 타 보면 창이 뿌옇기 때문에 크게 감흥이 없긴 하지만 콩에게 바다를 다시 보여주고 싶어 지정석으로 자리를 선택하고 기찻길에 올랐다.
가는 내내 콩은 기특하게도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아빠 옆에서 잠이 들었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기차 밖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육아동지라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없다. 아이는 하루종일 부모의 관심을 갈구하고 거기에 응대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데, 그 와중에 아이 먹을 것 입을 것 교육할 것과 안전까지 챙기다 보면 뇌가 분산되는 것은 당연지사.
개인적으로 아이를 낳고 온 엄마들이 '기억력 감퇴'를 호소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노화도 있겠지만, 이렇게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일상의 결과라고 믿는 나로서는 아주 가끔 주어지는 이런 심심한 시간이 참 소중했다.
도착한 오타루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호텔까지 10분은 걸어야 하는데!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비옷으로 가리고 우리도 미리 준비해 둔 비옷을 입고 달리듯 걸어 호텔에 도착. 아이는 유모차 안에서 엄마 다 젖었어요 ~ 축축해요 ~ 축축해요~ 를 외치며 마음을 더 급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신들린 듯 캐리어 짐과 유모차를 쌩쌩 밀어가며 마지막 숙소인 GRIDS PREMIUM Hotel Otaru에 도착했다.
1. GRIDS PREMIUM Hotel Otaru
예전에 오타루를 당일치기로 와 보긴 했지만, 오타루의 느긋함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에 1박을 결정했는데 결론적으로는 아주 만족했다. 이 호텔로 말할 것 같으면 욕장이 있고, 오타루 역과 일반적인 오타루 관광지의 중간에 있어 기차 이용과 시내 관광에 적합하며, 지은 지 얼마 안 된 호텔이라 깨끗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직원들의 친절은 당연하고 한국인 스탭도 있어 여러 모로 편했을 뿐 아니라 어메니티를 1층에서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되어 있는데, 신기하게도 컨실러와 베이스 크림이 담긴 1회용 키트도 있어 인상적이었다(찾아보니 남성용 커버 화장품인 거 같은데.. 이것도 좀 신기했다)
호텔은 아이가 있어 큰 방을 예약했고, 굉장히 임박한 시점이었는데도 조식포함 20만 원 초반대로 저렴했으며 위치도 준수했다. 후다닥 짐만 맡기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근처 초밥집 아무 데나 들어갔는데 자그마한 카이센동 하나에 3만 원씩 받아서 가격에 좀 놀랐지만 회가 맛있어서 나름 만족스럽게 식사를 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식사를 마쳐 가는 와중에, 브레이크 시간까지 30분도 더 남은 시점에 이제 가게 문 닫아야 하니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1차 빡침(심지어 다 먹고 누가 봐도 아이 옷 입히고 정리 중이었는데 굳이?)아 예예 하면서 급히 계산하고 나오는데 계산서에 5천엔이나 더 붙여 계산되어 돌아오는 길에 깨닫고 도로 가서 돌려받아야 했기에 2차 빡침이 있었다. (가게가 붐비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마지막 손님인데 계산 실수가 말이 되는가?) 게다가 분명 계산할 때 메뉴를 하나하나 읊어가며 계산해 줬기에 생각 없이 계산하고 나오는 중에 - 영수증도 주지 않았다 - 총액이 생각보다 많기에 도로 가서 영수증을 요구하고 먹지도 않은 초밥이 들어있기에 정정을 요구했다니 이상하다 아닌데...? 하는 반응. 처음엔 아니라고 하다가 이 메뉴들은 주문한 적도 없고 우리가 먹은 건 이거이거 뿐이야 얼마 돌려줘! 하고 일본어로 요구하니 그제야 미안하다고 하는 태도에 3차 빡침이 있었던 곳. 신기할 정도로 한국인 한정 좋은 평이 많던데, 일본인 리뷰는 그닥인 가게였고 삿포로 여행 통틀어 가장 짜증 나는 가게였다.
아무튼 무사히 환불받고 돌아와 호텔에서부터 운하, 오르골당으로 이어지는 관광 코스를 둘러보았다. 잔뜩 찌푸린 날씨였지만 비가 그쳐 다행이었고, 당일치기로 낮에 와서 급히 돌아갔을 때와는 달리 등불이 켜진 운하를 볼 수 있어 1박을 해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수년 만에 다시 찾은 오타루는 여전히 예쁜 세공품 천국이었고 홀로 와서 여유롭게 거닐던 거리를 남편과 아이까지 대동해 걷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앞으로도 내가 만들어낸 이 가족과 함께 혼자 방문했던 많은 곳들을 다시 가게 되겠지. 그건 그거대로 새롭고 행복하다.
내일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