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첫 그림책 작업일지
우당탕탕 첫 그림책 작업일지ㅇㅇㅇㅇㄹㄴㄴㅇㄹㄴㅇㅇㄹㄴㅇㄹㄴㅇ
브런치에는 솔직하게 써보기로 했으니까.
그림책 작가로 살고 싶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잘 그린 그림'에 크게 관심이 없다. 욕심도 없다. 사실 여전히 이걸 어떻게 모르겠다. 분명 그림을 잘 그리는 분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길은 내가 갈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림보다 서사와 메시지가 더 중요하고, 잘 그린 그림보다 엉성하지만 표정과 감정이 살아있는 그림이 좋다.
그림책을 계약하고 원화를 그려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전시에 만들었던 더미북. 이게 나에게는 원화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출판계(?)에서는 아직 엉성한 나의 그림은 원화, 출판이 가능한 수준의 그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림 한 장 한 장을 진득이 그려본 적 없는 나에게 원화는 정말 무거운 압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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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된 그림책들을 보니까 그림 밀도가 높더라.
그래서 한지 작업 위에 색연필로 밀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어찌 보니 그림책스러워(?) 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왜일까. 영 나답지도 않고.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가 한지를 좋아한 건 번지기 때문이었다.
MBTI J인 나는 자꾸 계획하는 걸 좋아한다. 또 한편으로 싫어한다. 계획해 둬야 마음이 편안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내가 피곤하다. 그런데 한지에 그림을 그리면 어차피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손이 가는 대로, 물감이 번지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나에게 휴식이었다. 근데 기껏 번지게 만들고 다시 색연필로 경계를 만들고 세밀하게 칠하니까... 음... 이건 아닌데? 싶어졌다.
원화는 노력이 많이 들어간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의 밀도를 높이는 것 말고 나는 원화에 어떤 노력을 담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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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에 도서관에 갔다.
초등학생이 하교하지 않은 시간, 텅 빈 그림책 서가에서 혼자 그림책을 읽었다. 아무 데서나 쏙쏙 뽑아 읽다가 아, 이거 좋은데 싶으면 그 작가 책을 다 찾아보는 방식으로 책을 읽었다. 왠지, 어릴 적 엄마가 두고 간 달팽이과학동화를 다시 읽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어깨가 가벼워졌다.
그러다 일본의 그림책 작가 기쿠치 치키를 만났다.
그의 근사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까 몇 가지 포인트만 나눠보려고 한다. 우선 그는 건축 베이스. (고백하자면, 내가 꽂힌 작가들의 80%가 건축 베이스. 출신은 못 속이는 걸까.) 건축을 전공하고 디자인 일을 하다, 10여 년간 디자인과 전혀 관계없는 청소 일을 했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잘. 청소 사업을 할까 생각하다 어느 날 중고서점에서 100년도 전에 지어진 프랑스 그림책 한 권을 보게 되는데, 그 책에서 받은 감동으로 그림책 작업에 뛰어든다.
그의 가장 멋진 점 중 하나는 다작이었다.
그는 첫 그림책을 만들 때도, 그다음 책들을 만들 때도, 기본 1,000장의 그림을 그렸다. 그 안에서 가장 알맞은 그림 몇 장을 꼽아 그림책으로 엮는 것이다. 한 장 한 장의 밀도 말고, 이런 방식의 밀도도 있구나. 커다란 충격.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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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음이 뻐-ㅇ 뚫린 만큼 작업도 뻥 뚫리지는 않았다.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굽이굽이였고, 말이 쉽지, 1,000장 그리기가 어디 숩나!
그치만 나는 무척 큰 문 하나를 열어낸 기분이었다.
* 참고
기쿠치 치키 작가님의 인터뷰들을 읽고 정리해 둔 글.
곧 2부도 써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