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부끄러운 감정을 세련되게 꺼내놓는 기술인 것 같다
나의 첫 회사에는 작은 LP 플레이어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LP플레이어만 있고 LP판이 하나도 없었다.
LP를 어디서 구한다, 하던 참에 근처에 자주 가던 카페 '문'에서
LP판 한 장을 빌려와서 계속 들었다.
나름의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아주 오래전,
내가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는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초등학교 때는 CD로 가수의 앨범을 사서 듣곤 했지만,
중학교 이후 MP3로 노래를 들으면서, 또 후에는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노래를 들으면서
한 가수의 앨범을, 한 예술인의 이야기를 이렇게 진득하게 들어본 적은 없었다.
뜬금없는 LP 플레이어 덕분에,
나는 변진섭이라는 가수에 한 시절 푹 빠져 지내게 되었고
이제 변진섭 노래라면 전주만 또르르 나와도
기가 막히게 알아맞힐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요즘.
남편에게 아기를 맡겨두고
혼자 공원에 뛰러 나가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은데 좀처럼 마음이 가는 음악이 없었다.
랜덤재생을 돌리다가 장기하의 콕콕 찌르는 비트에 왠지 마음이 갔다.
무언가 애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장기하 앨범의 노래를 순서대로 들었다.
사실 이 앨범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장기하를 욕했다.
아이유랑 사귀고 헤어지고 바로 이런 앨범을 내면
사람들이 다 노래의 상대가 아이유인걸 알 텐데,
'그러게 왜 그랬어' 같은 노래, 좀 너무하지 않나? 했다.
이별 전의 서로 못나진 상황을 이렇게 까발려야 하나? 싶었다.
그 당시 내 상황이랑도 겹쳐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공교롭게도)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그의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들으며 마음속으로 사과한다.
내가 장기하 속도 모르고 욕을 했구나.
이 사람도 헤어지고 많이 아팠구나.
어쩌면 많이 상처받았겠구나.
한 곡 한 곡은 단편에 불과하구나.
일기장과 예술의
공통점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꺼내는 것.
다른 점은 일기장은 날 것 그대로, 예술은 세련된 방식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여하튼 장기하 앨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