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사람 문어에 진심이다.
삶의 권태에 빠진 남자는 어린 시절 누비던 태평양을 다시 찾는다.
그곳에서 자신의 눈길을 끄는, 조개 껍질을 방패로 숨은 작은 문어를 만난다. 남자는 문어에게 다가간다. 몇날 며칠 문어의 특성을 조사하고 조금씩 조금씩 문어에게 다가간다. 태평양 한가운데 광활한 다시마 숲에서 남자와 문어는 손가락 사이로 빨판 하나씩 서서히 다가간다.
요 근래에 마음이 뚱했다.
예전엔 분명 그림책 그리는 게 나의 행복이었는데, 이제 막상 본격적으로 그림책을 그려야한다고 생각하니까, 즐거움보다는 의무감이 더 커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마음이 동해서, 설레어서, 얼른 무언가를 그려내고 싶다는 느낌보다는, 하루에 몇 장은 그려야지, 하는 못생긴 마음.
그래서일까, 권태에 빠진 남자의 마음이 훅 들어왔다.
아들과 아내, 직업,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태평양에 들어간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난 문어. '단 하나의 존재'와의 깊은 교감이 너무 아름답고 또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사랑은 저렇게 - 남자는 실수로 멀어진 문어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온갖 문어 논문을 섭렵하고, 다시마 숲을 기웃거리고, 기다린다. - 하는거구나. 나는 그림책을 좋아한다면서, 그가 문어에게 쏟는 애정의 몇분의 일이라도 그림책에게 주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문어... 당분간은 먹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