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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성 Sep 11. 2023

남는 건 사진

첫사랑의 기억

열한 해만에 증명사진을 새로 찍어야 했다. 취준생 시절 이력서에 붙이려고 찍은 증명사진을 그동안 신분증이든 토익시험이든 알차게 우려먹어 왔는데 갑작스러운 출장이 잡히는 바람에 유효기간 만료 직전의 여권을 당장 갱신해야 했던 것이다. 십 년 전의 여권 사진과 똑같은 것을 최근 6개월 이내에 찍었다며 우길 순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없이 근처의 포토 스튜디오를 찾았다.


힘든 과정이 되리라는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나는 톡톡히 곤욕을 치렀다. 사진사님이 입에 힘을 좀 푸세요, 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건만 나는 입에 힘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오히려 점점 긴장이 들어가고 있었다. 급기야 사진사님은 몸소 시범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아니, 입을 그렇게 (양 어금니를 꽉 누르며) 앙다물지 말고 크게 아아 (입을 쩍 벌리며) 했다가 자연스럽게 살짝만 (입술을 붙이며) 다물어보세요. 한참 실랑이 끝에 겨우 촬영을 마쳤지만 결국은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추가 보정을 거쳐야 했다.


분명히 나는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어쩌다 남의 카메라 앞에 서면 입부터 뻣뻣하게 굳고 자세가 급격히 어설퍼지는 긴장 증상이 나타난다. 내가 어떻게 찍히는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점증된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셀카가 상황이 더 낫느냐고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아서 이 정도면 조금 괜찮지 않은가, 하고 어물쩍 찍어보았다가 바로 삭제하기 일쑤다. 웃었는지 말았는지 애매한 셀카 스무 장쯤을 휙휙 넘기다가 당최 뭘 믿고 찍었나 싶은 자괴감에 고스란히 휴지통행. 남에게 제발 지워달라고 애원하느냐 아니면 내가 손쉽게 버리느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진 속 내 모습이 마음에 차지 않는 건 매한가지인 셈이다.
 

사진은 늘 나의 오래된 자기혐오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형상과 실제 결과물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도 넓어서, 때로는 누군가가 내 양 볼을 부여잡고 사진 속 이게 너의 본모습이라며 낄낄 이죽거리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나는 사진을 찍는 즉시 조건반사처럼 이번엔 또 어떤 단점이 얼마만큼 부각됐는지부터 집요하게 찾아내는 습관이 생겼다. 촌스러운 헤어스타일. 부자연스러운 입. 울퉁불퉁한 피부. 좁은 어깨와 짧은 다리. 때로 그런 건 보이지도 않는다며 타박을 받아도 내겐 크게 아우성치는 흠결들이니 흐린 눈으로 외면하기도 어렵다. 괜스레 요 몇 년 사이 화질이 부쩍 좋아져 과거의 ‘감성’을 잃어버린 아이폰 카메라를 탓해보기도 하지만.


특히 사진 찍히기를 기피해 온 것은 다른 어떤 결함보다도 눈의 문제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동자의 방향. 필름 시절부터 디지털 스크린과 스마트폰으로 넘어오는 긴 세월 동안 나의 눈동자는 정면을 바라보라는 카메라의 안내를 잘 따른 적이 거의 없었다. 왼쪽 동공이 오른쪽을 향해 안으로 몰리거나 시선의 종착지가 렌즈 대신 비스듬히 어긋난 방향으로 향하는 게 예삿일이었다. 정면을 보라고 지시하는 뇌의 명령을 눈동자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처럼. 의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양쪽 눈의 시각축이 평행하지 못한 증상이라고 했다.




사시의 역사를 되짚기 위해서는 엄마의 구술에 의존해야 할 만큼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두 살 무렵의 나는 종종 이유도 없이 열성 경련을 일으켰다고 했다. 인근에 달려갈 만한 변변한 병원이라곤 없는 아주 작은 동네에서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무작정 아랫집 문을 두드렸다. 공동 육아가 일상이던 시절이었고 아이 둘을 키워낸 아랫집 아주머니는 유경험자답게 아기를 들쳐업으며 능숙하게 울음을 달랬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경련을 몇 차례 반복해서 겪다가 어느 순간 엄마는 알게 되었다. 아들의 눈동자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이웃들이 저 집 아이 ‘간질’ 아니냐며 수군대는 마당에 ‘사팔뜨기’라는 흠을 남겨두기 싫었던 엄마는 나의 사시를 고쳐야 한다는 부채 의식을 가졌지만, 연이은 두 번의 임신을 견뎌내면서 온전히 나에게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기에 조금 더 크면 절로 괜찮아지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만 품었을 뿐. 어영부영 학부모가 된 초보 엄마는 나를 학교에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 학년 담임 선생님의 걱정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다른 아이들이 사팔뜨기라고 놀리네요. 제가 잘 타이르긴 할 건데…
 

그 해 겨울 엄마는 서울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대학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의사는 이른 나이에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을 선뜻 권고하지 않았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으니 일단 안경부터 씌워보고 지켜보세요. 성인이 될 때까지 문제가 있으면 그때 수술해도 늦지 않습니다. 엄마는 병원을 나오면서 스무 살에 수술을 해주겠노라고 나와 약속했다. 그때 나는 사시가 앞으로의 삶에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가늠하기엔 너무 어렸다. 안경을 쓰면 어른에 가까워지는 기분이라 도리어 우쭐했다면 모를까.
 

의학적 판단은 아마 옳았겠지만 사춘기 무렵부터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를 기다리기엔 이미 늦었다고 여겼다. 자의식이 자라나면서 사시 콤플렉스를 안고 사는 무게는 만만치 않게 버거워졌다. 일상생활에선 적당히 눈길을 감추며 남이 알아챌 틈을 주지 않을 수 있었다.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는다 해도 그저 내성적인 성격 문제로 돌리면 되니까. 하지만 순간을 기록하는 사진만큼은 도무지 속일 도리가 없었다. 반 전체가 우르르 모여 찍은 단체사진을 받는 날이면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혼자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 있는 나의 시선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누군가 얘 눈 사팔이라며 큰소리라도 내지 않을까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졸업앨범 사진을 찍는 날은 악몽이었다. 그나마 무리 속에 나를 숨겨보기라도 하는 단체사진과 달리 졸업사진 촬영은 나와 카메라가 꼼짝없이 일대일로 부딪혀야 하는 시간이었다. 평소에도 제멋대로인 눈동자는 긴장한 탓인지 유난히 제어 불능이었고, 주어진 시간 안에 수백 명의 사진을 찍어야 할 사진사님은 여길 똑바로 보라며 짜증스러운 듯 카메라를 탁탁 두드렸다. 나는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들을까 봐 더럭 겁이 나서 제발 목소리만이라도 낮춰주시길 바랐다. 그런데 저는 항상 카메라를 보고 있었어요…




남자를 좋아한다는 정체성을 자각하고 일 년쯤 지난 열여섯 살에 나는 같은 반 친구 P를 보며 처음으로 설레는 감정을 품게 됐다. 그러나 결국 나는 첫사랑이자 짝사랑을 겪으며 출렁이는 감정의 너울을 견디다 못해 P를 차갑게 외면해 버리고 마음을 식히길 택했다. 그때의 나로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아무 이유도 듣지 못한 채 밀쳐진 그는 적잖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매일 서로 달라붙어 있다가 삽시간에 멀어진 우리는 어색한 사이로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다른 반이라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게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짧은 인사만 멋쩍게 오갈 뿐이었다. 나는 우리가 친구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사실이 슬펐지만 이것 역시 한때의 감정일 뿐 마침내 휘발될 거라며 애써 씩씩한 척을 했다.
 

열여덟 살에 우리 학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마침 손에 쏙 잡히는 컴팩트한 사이즈의 디지털카메라가 앞다투어 보급되고 있던 때였다. 자전거 탄 풍경의 노래가 흐르는 동안 전지현이 추억을 회상하는 광고로 대박을 친 카메라가 우리 사이에서도 유행이었다. 한라산을 오르다 중턱에서 잠시 쉬는 동안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무리 지어 디카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사진을 찍을 리 없는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멍한 내 눈앞에 어느새 기척도 없이 P가 나타났다. 그는 손을 내밀며 뜻밖의 말을 건넸다. 바로 그 전지현 카메라를 들고서.
 

우리 같이 사진 찍자.


소년다운 장난기를 한아름 품어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가슴을 녹였던 예의 빙글거리는 미소가 P의 얼굴에 가득 떠 있었다. 복잡한 설렘을 처음 깨닫게 했던, 나를 허물었다가 다시 붙잡기도 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우리 사이가 멀어진 후 2년 동안 주고받은 말이 채 열 마디가 안 될 텐데. 서로가 가까운 반경 안에 있는 상황을 의식적으로 피해왔는데. 갑자기 나타나 사진을 찍자는 말에 나는 그저 아연해서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P는 대답 없이 쭈뼛대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수선한 마음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있는 사이 그는 내 어깨에 오른팔을 두르고 하나 둘 셋 숫자를 카운트했다. 찰칵, 짧은 촬영음과 함께 셔터가 눌렸다. P는 말없이 싱그러운 미소만 남긴 채 발길을 돌렸고 나는 잠시 꿈을 꾸었나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고 P는 먼 복도 끝 우리 반을 찾아왔다. 줄 것이 있다고 했다.


그날 찍은 우리 사진이야.


사진을 건네받고 나는 그만 책상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문제의 사진 속에 담긴 것은 정면을 응시한 채 빙그레 미소 지은 P와 그 왼편에 우두커니 석상처럼 굳은 나였다. 추레한 옷차림과 납빛의 안색도 거슬렸지만 무엇보다 나는 평행한 시각축을 유지하지 못한 눈동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어김없이 렌즈를 향하지 않고 어디인지 모를 허공으로 동떨어져 있는 눈동자를. 내가 좋아했던 사람 앞에서만큼은 한 번만이라도 똑바로 카메라를 바라봐주면 안 되었던 걸까. 흩어진 눈동자가 나를 비웃는 듯했다. 사팔뜨기 게이 자식 꼴좋다. 자기혐오가 마른 들판 위의 불길처럼 거세게 일어나 속이 쓰렸다.
 

나는 내가 죽도록 미운 한편 P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차라리 우리가 한창 주고받았던 이메일로 보내줬더라면 휴지통에 던지고 말았을 텐데 구태여 프린트까지 해서 전해준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새 누가 번거롭게 인화를 한다고. 디지털카메라 좋다는 게 다 뭔데. 영원히 감추고 싶었던 콤플렉스가 인화지 위에 풀컬러로 박제된 물성의 존재로 나타나 버렸다. 그것도 하필 내가 깊이 짝사랑했던 상대 옆에서. 나는 여전히 P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의 카메라도 얼굴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자신이 더없이 초라했다. 혹여나 마주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의 반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예전보다 더욱 일부러 피해 다녔다. 똑바로 눈을 마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안 보는 편이 나았다. 우리가 다시 둘이 되는 일은 없었다.


스무 살이 되어 엄마는 약속을 지켰고 나는 서울로 올라와 사시 교정수술을 받았다. 두 눈동자가 고스란히 정면을 향한 거울을 바라보는 건 내가 기억하는 인생에서 처음 겪는 낯선 감각이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무리가 없을지 몰라도 사진을 찍을 때마다 눈동자는 여지없이 갈 곳을 잃곤 했다. 카메라를 어떻게 정확히 응시해야 정면을 보도록 찍히는지 경험적으로 몰라서 뇌가 명령할 수 없는 것처럼. 오래도록 인이 박힌 탓일까. 나는 지금까지도 렌즈 보는 법을 모른다. 여권 사진을 찍은 스튜디오에서는 수없이 지적한 입매뿐만 아니라 눈동자도 슬쩍 고쳐주었다. 큰소리를 내지 않아 주셔서 감사했어요.




정형외과에 가야 한다며 하소연하는 엄마의 전화가 걸려온 건 석 달 전 일이다. 가구에 부딪힌 새끼발가락이 절걱대서 병원에 갔더니 골절이라고 무릎까지 깁스를 칭칭 감아놓았네. 일주일 후에 오라고 했는데 목발 짚고는 영 못 걷겠고 요새 택시는 도통 잡을 수가 없고 말이야. 충청도의 딸인 엄마는 운전기사가 필요하다는 뜻을 한 바퀴 에둘러 전하는 중이었고 나는 군말 없이 본가로 가는 일정을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엄마한테 카카오택시 잡는 법을 가르치겠노라 다짐하며.


한 시간을 운전해 도착한 집에서 정작 엄마는 병원 갈 채비도 않고 우리 남매의 사진 앨범을 들춰보는 중이었다. 엄마는 늘어지게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안일 다 끝내놓고 티브이에도 본방으로 다 본 예능만 해서 심심할 때 이렇게 앨범 보며 가는 세월 붙잡는 거야. 아날로그 시대의 산물인 두꺼운 앨범 두 질이 책장 밖으로 나와 있었다. 깜짝 놀란 표정의 구피가 그려진 내 앨범과 트위티가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의 앨범. 마치 우리가 앨범 속에서는 영영 천진한 시절에 머물기라도 할 것처럼 오래된 만화 캐릭터들이 커버를 지키고 있었다. 나도 엄마 옆에 주저앉아 세월 낚시에 동참하기로 했다.

 

일곱 살까지의 시간은 참 느리게도 흘러서 앨범의 절반 이상을 넘겼는데 나는 아직 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다. 비 오는 날 텐트 속에서 점퍼 모자를 당겨 쓰고 병아리 떼처럼 모여 앉은 사진을 보다가 엄마가 몇 마디 거들었다. 어렸을 땐 뻔질나게 여기저기 잘도 데리고 다녔는데 너넨 기억도 안 나지. 그래도 남는 건 사진이라고 했어. 사진이라도 남겨 놓았으니 이렇게 보면 다 기억나는 거야. 남는 게 사진이라는 말은 엄마가 유별나게 자주 쓰는 말버릇 중 하나였다. 어디 놀러라도 가면 양손 브이 포즈와 잔뜩 꾸며낸 미소로 사진을 찍으면서 자식들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말하곤 했다. 남는 건 사진이라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서부영화 주인공처럼 장난감 총을 든 채 ‘검은 고양이 네로’ 공연을 하는 나, 색동한복 차림으로 연지곤지를 찍은 각시 곁을 맴도는 신랑 연기를 하는 나, 엄마의 주부대학 졸업식날 디스코를 추는 나의 사진들이 스쳐갔다. 무대가 체질인 퀴어의 푸른 싹수가 보였는데 어째 리듬도 탈 줄 모르는 몸치로 자랐을까 싶어 살짝 웃었다. 일곱 살 어린이는 다음 장에선 여덟 살이 되고 그다음엔 열 살이 되더니 어느덧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있었다. 몇 장 남지 않은 앨범의 시계가 바삐 돌아갔다. 엄마는 내가 스스로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무렵부터는 부연설명을 덧붙일 역할을 잃고 외출 준비에 나선 참이었다.

 



앨범 끝자락을 팔랑팔랑 들추다 반 페이지 분량에 불과한 고등학생 시점에 도달했을 때 나는 제주도 사진을 발견했다. 십수 년만에 보아도 렌즈를 쳐다보지 않는 어긋난 시선이 본능적으로 제일 먼저 보여 거북해졌다. 단점 찾기 습관이 발동했으니 잽싸게 넘겨버릴 요량이었는데 문득 열여덟 살의 기억을 더듬으려 손을 멈추었다. 분명 나는 이 사진을 보는 게 괴롭고 견디기 힘들었는데도 끝내 버리지 않고 앨범 한구석에 끼워두었다. 왜 그랬는지 당시의 기억이 정확히 떠오르진 않지만 아마 그게 우리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단체사진도 졸업앨범도 아닌, 사각의 프레임 안에 우리 단둘만 담긴 사진. 열여덟의 나는 열여섯부터 이어져 온 기억을 간직하려는 마음으로 사진을 남겨두지 않았을까.


그 순간 기억이 통으로 쏟아지듯 에피파니가 찾아왔다. 비로소 나는 시간을 거슬러 P가 사진을 인화한 이유를 어렴풋이 헤아려볼 수 있었다. 두 장을 인화해서 나에게 한 장 나누어주고 나머지 한 장은 자신이 가지려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을 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학생 사백 명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아수라장 속에서 나를 찾아내고 다가와 손을 내밀었던 그의 마음을 뒤늦게 곱씹어보았다. 과연 나와 같은 감정을 그 역시 한순간이라도 품었을는지 평생 알 길이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만의 사진을 남기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저장하려 했던 마음만큼은 알 것 같았다. 그건 분명 다정한 온기가 담긴 마음이었다.
 

콤플렉스에만 집착하기 바빴던 나는 우리의 유일한 사진에서조차 내 눈동자를 미워하느라 당연한 것을 잊고 있었다. 사진은 피사체의 것만이 아니라 사진을 찍고 보며 간직하는 사람의 몫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소식이 끊어져 만날 수 없는 그는 지금까지 사진을 간직하고 있을까. 나는 오른쪽 절반에 담긴 소년의 초롱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처음으로 내게 사랑을 북돋웠고 짙은 후회를 새기게 했던 열여섯의 얼굴이 애틋한 기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는 건 사진이라더니, 사진이 남아서 참 다행이었다. 앨범에서 사진을 꺼내어 귀퉁이를 꼭 쥐자 인화지 너머의 시간을 건너온 다사로운 기운이 두 손 안으로 곱게 퍼져나갔다. 뭉그러진 그리움을 그러모아 한참 쓸어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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