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애의 끝은 형편없었다. 몰래 다른 사람이 생겼다거나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싸운 일도 없었고 다만 끓여놓고 잊어버린 홍차처럼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려 끝났을 뿐이었다. 자기 위주의 흥미와 소상한 불만들을 난데없이 속사포처럼 쏟아붓고 사라지던 연락조차 날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어느 순간 나는 우리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긴 잠적 후에 다시 나타난 그는 내게 물었다. 우리 왜 이렇게 됐을까. 답을 안다 한들 이미 돌이키기엔 늦은 사이였기에 나는 굳이 수고롭게 답하지 않았다. 이별 통보마저 없는 시시한 결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결코 담담할 수만은 없어서 작지 않은 좌절감을 맛보았다. 그는 내 생활 반경 근처에 있던 사람이었고 마침 여러 우연과 행운이 겹친 덕분에 게이임을 확인하고 연애까지 이르렀는데 일상에서 이런 인연을 다시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나는 항상 순정 로맨스를 꿈꿨다.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난 사람과 평생의 인연으로 발전해 청첩장을 돌리는 드라마를 찍고 싶었던 것까진 아니어도 일상 속에서 만난 사람과 차차 호감을 키워가는 관계가 나에게도 허락되길 바랐다. 시쳇말로 ‘자만추’가 게이에게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모르진 않았지만 한 번쯤 꿈은 꾸어볼 수는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면서. 하지만 소원을 이룬 것 같았던 첫 연애가 실망스럽게 끝나고 나서 나는 하릴없이 온라인의 세계를 기웃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스마트폰의 물결이 퍼지면서 게이 전용 만남 어플이 핫하게 떠올랐다. 그곳에선 당연하리만치 얼굴 대신 적나라하게 벗어젖힌 몸과 먼저 인사하는 일이 잦았다. 나는 일말의 저항감에 뒤로 물러서다가도 솔직한 호기심에 다시 몸을 당기길 반복하면서 육욕이 몸을 끝까지 당긴 날엔 충동적인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오던 밤의 길거리에선 닳고 해진 마음이 솜뭉치가 되어 흩날렸다. 원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아니었구나. 하룻밤의 유효기간은 짧았고 나는 내일을 갈망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함께 내일을 맞이할 사람을 만나야 할까. 벽장을 나오기 전에도 외로웠는데 문을 열고 나온 후에도 여전히 마음 둘 곳이 없어 한참을 외로웠다.
알음알음 눈팅만 하던 취미 커뮤니티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소모임 홍보 글을 보았을 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앞뒤 재지 않고 대뜸 가입을 신청했다. 아마도 혐오자의 유입을 막기 위함일 번거로운 인증 절차를 거쳐 가입에 성공한 나는 공지사항부터 훑었고 마침 다음 주말에 정모가 열린다는 글을 발견했다. 얼른 20문 20답 양식에 맞춰 가입 인사부터 작성했다.
안녕하세요, 루시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D
1. 닉네임: 루시안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에서 따왔습니다.)
2. 정체성: G
3. 나이: 스물넷
4. 좋아하는 것: 영화 보기. 특히 박찬욱과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좋아해요!
…
시답잖지만 적당히 취향을 드러낼 만한 답변으로 첫 글을 남기고 장기간의 네티즌 생활로 단련된 ‘닥눈삼’을 마치자마자 호기롭게 정모 참석을 신청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정모 참석이 처음도 아니라서 새삼 긴장할 건 없었으며 그래도 몇 년 전에 비하면 사회성도 조금은 늘지 않았나 자평해 보기도 했다. 나는 당장 누구라도 만나야 했다. 일상도 번개도 아닌 곳에서.
정모 장소는 각종 술과 함께 결들일 요리를 파는 종로의 한 주점이었다. 나는 공지된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참석을 신청할 때의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는지 잔뜩 긴장해서 몸을 움츠렸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퀴어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순간이었다. 일부러 주변을 한참 서성이다 십 분쯤 지났을 무렵 주점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기다란 소파가 놓인 한쪽 벽에 2인용 테이블 여럿을 이어 붙여 단체석으로 만들어둔 공간이 보였다. 테이블은 절반 정도만 차 있었지만 내가 찾아온 정모라는 것을 눈치챌 만큼은 되었다. 그래도 혹여 아닐지도 모른다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우물우물 말을 건넸다.
혹시 여기가 그… 소모임인가요.
닉네임이 어떻게 되시죠?
아… 저 루시안이라고 하는데…
아하, 얼마 전에 가입하신? 제가 아보카도예요.
자신을 아보카도라고 소개한 사람은 소모임의 창립 멤버이자 운영자였다. 아보카도는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뉴비가 왔으니 다들 자기소개를 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자기소개에 맞추어 다른 참석자들과 한 명씩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었다. 아보카도를 포함한 레즈비언 넷 사이에 선이 굵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태도로 손만 조몰락거리는 게이 한 명이 있었다. 차례가 되자 그는 부끄러움을 지우지 못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G이고 닉네임은 라울입니다. 스페인 축구선수 라울을 좋아해서요.
맞다. 라울님도 오늘 처음 온 뉴비세요. 그러고 보니 뉴비분들 닉네임이 프랑스어랑 스페인어 이름들이네.
뉴비들의 어색함을 풀어주려는 듯 아보카도가 말을 덧붙이며 손뼉을 짝 쳤다. 사람들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화제 삼아 떠드는 분위기 속에서 L 셋과 G 한 명이 우르르 도착해 열 자리가 가득 찼다. 알고 보니 그들은 이미 지난 여러 차례의 정모에서 만나면서 친분을 키워온 사이였기에 오직 루시안과 라울만 자기소개를 한 번씩 더 하면 되었다.
새로 도착한 G 남자는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민무늬 티셔츠 위에 가벼운 청재킷을 걸친 차림이었다. 살짝 피곤함이 드리운 표정이었지만 갸름한 눈매와 얇은 복숭아빛 입술이 제법 취향이어서 나도 모르게 흘끔흘끔 쳐다보게 되었다. 옆을 짧게 친 머리에 적당히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와 짙은 인상의 눈 때문에 스페인식 닉네임이 잘 어울리는 라울과는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나는 어느 순간 두 사람을 저울질하며 식 노식을 판단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흠칫하며 손가락을 비틀었다. 번개 같은 자리 아니라는 걸 알고 왔으면서.
모두가 모이고 나니 결과적으로 여덟 명의 지인 사이에 낯선 둘이 끼어든 모양새가 되었다. 그들만 공유하는 역사가 길게 회자되는 순간들이면 나는 마땅히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라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말없이 손만 주무르는 시간이 길어 보였다. 아보카도는 모임장답게 대화가 너무 치우친다 싶을 때 적당한 공통 화제를 찾아내 루시안의 생각을 묻는 배려심을 발휘했지만 나는 적당히 대꾸하고 어색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어쩐지 이곳 또한 맞지 않는다는 소외감이 드는 가운데에서도 청재킷 형의 움직임을 틈틈이 살피는 제 자신의 얄팍함이 가증스러워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두어 시간쯤 지나고 아보카도가 공식 정모는 여기까지라며 끝을 선언했다. 집으로 가실 분들은 조심히들 들어가시고요. 2차 가실 분들은 절 따라오세요. 종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열 명의 퀴어들은 2차를 외친 여섯과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넷으로 그룹이 나뉘었다. 청재킷은 2차 그룹에 남았지만 나는 슬그머니 지하철 그룹으로 발을 옮겼다. 2차 그룹이 근처 호프를 물색하는 사이 지하철 그룹에 남은 멤버들은 내향인이라면 익히 알 만한 의례적인 핑계를 대며 하나둘 그룹에서 빠져나갔다. 저는 편의점에서 담배 좀 사야 해서 들렀다 갈게요. 저도 화장실이 급해서 먼저 가세요.
결국 지하철 그룹에 남은 건 나와 라울이었다. 화장실 핑계를 선수 치려다 빼앗기고 이젠 무슨 변명으로 이 자리를 떠야 자연스러울까 골몰하는데 라울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저희 혹시 따로 술 한잔 하실래요. 혹시라도 이게 그린라이트인가요 싶은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랐는데 투명한 표정이 읽혔는지 그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얘기를 하고 싶어서요. 하긴 나는 그럴 만한 매력 자본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고, 웅얼웅얼 속마음을 삼키면서 어쩐지 망설임 없이 그의 제의를 수락했다. 그래요, 우리 가요.
우리는 닭을 튀기지 않고 오븐에서 구워내 더욱 담백하다고 선전 중인 치킨집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마주 앉은 둘 사이에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모에서도 딱히 몇 마디 오가지 않았을 만큼 낯을 가렸는데 따로 술 한잔을 더 하자는 제안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 까닭이 궁금해서 무심결에 받아들인 것도 있었다. 냉장고에서 방금 꺼냈는지 유리에 얼음 조각이 송골송골 맺힌 500cc 맥주 두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묵묵히 잔을 부딪친 후 목을 축인 라울이 드디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저 오늘 외로웠어요.
외로웠다는 말이 순간 찌릿하게 폐부를 관통했다. 저도요, 라고 답하는 동안 빗장을 채운 마음이 스륵 풀리는 걸 느끼며 나는 라울을 다시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까는 마냥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조도가 한층 낮아진 조명 아래 그의 얼굴에선 어둑한 그늘이 스쳐보였다. 그 역시 나의 얼굴에서 비슷한 그림자를 보고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같은 외로움을 공유한 채 밤의 종로를 떠돌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나는 망한 연애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다 로맨스의 꿈과 일회성 만남 사이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뭐가 맞는지 사람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오븐구이 치킨을 그릇에 포크로 굴려가며 이야기를 듣던 라울은 역시 외로웠던 자신의 연애사를 답례처럼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커다란 눈망울로 가만히 시선을 맞추며 불쑥 덧붙였다. 어떤 마음도 틀린 것은 없는 것 같아요. 문득문득 외로움이 파고들어도 다 괜찮아질 겁니다. 혼자만 그런 건 아니니까요. 서툴지만 진정을 다한 위로였다. 겉모습만으로 쉽게 판단했던 얼마 전의 내가 부끄러워 낯이 화르륵 타올랐다. 입을 열면 울컥하는 마음이 쏟아질 것 같아 말없이 맥주만 벌컥 쏟아부었다.
어느덧 막차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의자를 밀고 일어서는데 머리 위로 취기가 훅 올라왔다. 앉은 자리에선 잘 몰랐는데 정모에서 마신 술에 더해 이미 생맥주를 몇 잔이나 들이켜고 난 후였다. 라울 역시 약간 취한 듯 몸을 일으키며 걸음이 흐트러졌다. 다시 한번 우리는 종로의 부드러운 밤거리로 나왔다. 가을의 초입으로 향하는 늦여름의 끝자락이라 부쩍 선선해진 밤공기가 발그레 달아오른 몸을 식혀주었다. 지하철 그룹에 마지막으로 남은 두 멤버는 역 출구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간절히 여름을 붙잡으려는 매미의 절규가 멀찍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술기운의 힘을 빌린 것이었을까. 미처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걸 느꼈다. 나는 손을 흔들던 라울에게 다가가 두 팔을 크게 벌리고 그를 와락 끌어당겨 안았다. 잠시 멈칫한 라울은 이내 팔을 올려 나의 등을 포근하게 감쌌다. 우리는 식어가던 하나 하나의 몸이 둘의 체온으로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안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종로 한복판 위에 둘만의 안온한 버블이 생겨났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마음으로 삼킨 말들이 규칙적인 심장 박동을 타고 전해져 왔다. 얘기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저도 많이 외로웠는걸요. 앞으로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겠죠. 그래도 그동안 참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위로가 되었어요. 저도 위로를 받고 갑니다. 나는 마음속 우물에서 길어 올린 진심을 몸으로 실어 보냈고 그 역시 그러고 있다고 믿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한참의 시간 동안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마침내 다시 서로 눈을 마주 보았을 때 나는 내가 전해 들었다고 생각한 라울의 목소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우리는 외로움의 무게를 절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각자의 방향을 따라 제 갈 길을 갔다. 스페인의 이름을 딴 그는 얼마 후에 닉네임이 가리키는 나라를 향해 긴 여정을 떠났을 것이었다. 매미가 마지막 기력을 다해 우는 밤거리를 걸을 때면 나는 이따금 라울을 떠올리며 조용히 그의 안녕을 빌었다.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도 종로에서 안아줄게요.
추신. 닉네임은 실제와 다르게 바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