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세이] 산책하는 마음(3)
나이가 들면, 나라는 한 인간을 관찰자 시점으로 보게 되는 눈을 갖게 되는 모양이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한 것을 두고 예전 이삼십대의 내 머릿속엔 나는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랬을까, 라는 독백이 자주 들렸다면 언젠가부터는 이 인간 또 이러고 있네, 니가 그렇지 어디 가겠냐, 라는 타자 목소리를 띤 나레이션이 종종 들린다.
예전 이삼십대의 나는, 나라는 껍질을 움집으로 삼고 거기에 조그맣게 뚫린 두 구멍으로 바깥세상을 건너다보며 산 느낌이라면, 지금은 어느 정도 바깥에서 떨어진 지점에서 안으로 나라는 움집을 바라보거나 때로는 타인처럼 구경하는 느낌이 커졌다. 나와, 혹은 나들이 함께 오래 수십 년을 살면서 일어나는 기이한 촌극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느 정도 관찰자 시점을 갖게 되면서, 분명 거기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던 내 주변의 환경이나 풍경, 사정 같은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내 삶이 오롯이 나로부터, 내 생각으로부터, 내 꿈으로부터, 내 선택으로부터, 내 노력으로부터, 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 수 있다는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면서 보기 시작했다.
관찰자로서 나를 바라보면서, 예전의 내가 크게 보였다면 지금은 나를 둘러싼 환경이 태산처럼 거대하게 느껴져 어느 땐 나라는 인간을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아예 찾아볼 수 없을 때도 있다. 먼지보다도 작고 하찮은 내가 아무리 애쓴다고 해서, 어떻게든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거대한 세상 흐름 속의 나라는 조각을 내 의지대로 오려내거나 꺼내거나 불태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지치고 무력감에 치를 떨었지만, 이제는 사는 게 너무 피곤하고 절반 이상은 그만하고 싶은 마음조차 친구처럼 껴안고 견디면서 세상 속의 나라는 조각을 때론 안쓰럽게 바라보고 때론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를 세상이라는 거대한 이야기 속의 행인 1, 2 정도 등장인물로 바라보고 있다. 행인이라는 배역은 등장인물이긴 하지만, 실은 (누군지도 모르는) 주인공 캐릭터와 서사에 더 깊이 더 크게 집중시키기 위해 배치된 구성물, 혹은 장치에 불과하기도 하다. 사람으로 나오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이 아닌 존재일 수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행인은 이런 자신의 역할에 관해 모르고 있다. 크게 오해하고 있다.
지난날의 독서를 후회하는 이유는 뭘까. 훌륭한 이들의 삶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비범하고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평범하면 안 된다는 것.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책이 심어준 생각이었다. 학교나 사회에서 심어준 기준이었다. 훌륭하다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건 불행한 일이라고 여겼다. 자신에 대해 비현실적 기대를 품은 탓에 오랜 시간 나답게 사는 게 얼마나 충만한 일인지 깨닫지 못했다.
- 부희령, <가장 사적인 평범> pp.8-9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바깥에서 끌고 들어와 내 안에다 이식시켜놓은 엉뚱하고 허황된 기대를 이제는 삭제하려고 노오력을 해야 하는 행인 1이나 2 역할 정도로 살아도 충만하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목울대에 통증 같은 서글픔이 차오른다. 더는 삶에 기대나 희망이 없는데 무슨 재미로 살아가나 우울해진다. 하지만 나만 착각했지 내 지나온 삶이 실은 행인 1이나 2 역할로 살아왔지 않나 싶다. 그동안 삶에 어쩌다 가끔 아주 작은점 같은 순간, 충만한 때가 있지 않았나? 앞으로 삶에도 그 정도의 어쩌다가 만나는 미비한 충만감이 있긴 있겠지 싶다.
그런데 삶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 없다고 사는 데 재미가 없을 거라는 예상은 또 어디서 날아들어서 내 안에 자리를 잡았을까. 그 생각이 책에서든 영화에서든 드라마에서든 뉴스에서든 주변 사람에게서든, 어쩌면 본능처럼 내가 타고났든, 그런 가치판단을 껴안고 사는 너도나도 서로 주고받고 영향 끼치며 살았다.
이따금 내가 들어가 앉아 있던 좁은 구석을 떠올린다. 사회적 통념과 경쟁, 그리고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나에게 하나의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내 눈앞에 열여덟 살쯤 된 여자애가 그러고 앉아 있다면 가여운 마음이 앞설 것이다. 그 애에게 말해주고 싶다. 보통의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의 일반적 가치에서 자유롭기 힘들다고. 사회구조나 체제의 틀에서 빠져나올 힘을 지닌 이들은 극히 드물다고, 너와 네 부모의 행동이 나약하고 가식적이라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누군가가 손을 뻗어 좁은 구석에서 끌어내주기를 바라던 어린 마음을 이제 나는 경멸하지 않는다. 달리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두려움으로 굳게 잠긴 문을 스스로 여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님을 알려주고 싶기는 하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도 상상하는 것처럼 높고 견고한 장벽이 아니라는 것도. 물론 언젠가는 스스로 알게 되겠지만. - 부희령, <가장 사적인 평범> pp.127~128
삶은 여전히 수수께끼고 미스터리여서 내가 뭘 모르고 어떻게 오해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살면 살수록 나라는 존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나를 붙들고 오랜 세월 동안 내가 잘하면, 정신 차리면, 열심히 하면 어떻게 달라질 것이고, 뭐가 될 것이고, 어디론가 도달하게 될 거라고 닦달했었던 내가 내게 미안하고 사과하고 싶어진다.
어쨌든 하찮고 지리멸렬한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될 것이고, 나라는 조각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다 언젠가 꼬르륵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겠지만, 관찰하는 자아가 나를 둘러싼 환경을 증언하고 다른 시점의 눈으로 나라는 풍경을 새롭게 그려주고 있다.
세상이 내게 주입했거나 내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헛된 망상 같은 생각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나라는 인간을 바라보고 구경하는 <그것>이 다만 내가 잘못해서, 못나서, 이상해서 꼭 이런 것만은 아니라고, 그것은 어느새 내게 이해하고 받아주고 해석하는 자아가 되어 되돌아올 것 같다. 이런 삶에 대한 기대, 나쁘지 않다. 썩 괜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