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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윤 Oct 03. 2016

선홍빛 인연

칼라파테

  한국인 여행자에게 칼라파테에 모레노 빙하보다 유명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린다 비스타Linda Vista 이다. 남미 여행을 시작하며 참여하게 된 메신저 단체방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행자들에게 정보와 마음을 주시던 분이 계셨는데, 칼라파테에서 독채 숙소를 운영하시는 노령의 사장님이었다. 늘 칼라파테와 더불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주력한 아르헨티나와 간간히 칠레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시며, 여행자들이 여러모로 감사함을 느껴 숙박을 청하면 배낭여행자에겐 과한 숙소라시며 흔쾌히 다른 숙소에 전화예약까지 해주시던 사장님 부부. 그럼에도 방문하는 모든 한국인 여행자에게 크루아상과 커피, 누군가에겐 미역국을 내주셨다.


on the wood bridge @El Calafate, Argentina

  우리는 칼라파테에 도착하기 전 앱으로 알아본 최저가 신생 숙소를 찾아 따뜻하게 이틀을 지냈지만, 결국 최저가였던 그 숙소는 마을에 대한 정보가 없던 우리에게 장을 보거나 투어를 신청하기 위해 2km는 걸어야 했던 외곽의 숙소로 기억에 남았다. 칼라파테에 도착해 모레노 빙하 투어를 마치고 찰텐으로 가 따신 사흘을 보내고 돌아오니, 사장님 내외가 또다시 우리를 반겨주셨다. 그곳에서 희한한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가 찰텐으로 떠나기 전, 막 린다비스타에 도착한 세 사람였다. 


  그들은 우리가 향할 바릴로체에서 반대로 내려온 2녀1남의 여행자였는데, 그 추운 날씨에 셋 모두 맨발에 같은 슬리퍼를 신고 두터운 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몸통보다 큰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바릴로체에서 칼라파테 까지는 거진 30시간이 걸리는 20만원 상당의 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 버스를 세상모르고 자느라 놓쳤다가 가까스로 사장님의 도움으로 칼라파테에 도착한 이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배낭여행자들의 원수인 빈대에 물린 상태였다.


Backpackers @El Calafate, Argentina


  우리는 그들을 찰텐에서 다시 만났다. 나를 보자마자 언니라고 칭하던 그녀들은 이내 다시 "언니 맞으.. 시죠?"라며 머쓱해하며 물었다. 내가 이틀째의 찰텐에 피츠로이 타임랩스를 찍고 내려온 날 저녁, 그들은 닭백숙을 먹으며 다음날 포인세놋으로 캠핑을 간다고 했다. 엄동설한에 모두가 W트래킹을 포기하고 찰텐으로 왔건만, 굳이 장비를 대여해 붉은 피츠로이를 가장 가까이서 보겠노라 와인을 부어라 마셔라 하는 그들의 청춘이 부러워서였을까, 나는 그녀들에게 우리의 침낭 라이너를 쥐어주었다. 일행 중 막내였던 친구의 고생으로 찰텐까지도 승용차를 렌트해 온 그들은 하루만에 캠핑을 마치고 우리보다 하루 먼저 칼라파테로 돌아갔다. 칼라파테에 도착하면 꼭 한 잔 함께 하자던 약속을 지켜 우리는 그들이 감사의 표시로, 혹은 여행 중 사치로, 묵고 있던 린다비스타에서 취기가 오른 통성명을 했다.


  맥주와 와인을 섞어 마시며 남자친구의 프리다이빙 이야기, 그들의 파란만장했던 여행기를 나누며 내일은 꼭 제육볶음을 해드리겠노라 약속을 받고 새벽이슬이 내리던 아침 새벽에 과실주에 제대로 취한 남자친구를 부축해 숙소로 돌아간 기억이 난다. 마음부터 급했던 우리 둘 여행에 그들은 오아시스 같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입장료 5페소짜리 카지노에 가 내가 전자 룰렛으로 확률게임을 해 꾸준히 모아 100페소를 200페소로 만드는 동안 룰도 모른 채로 내키는 버튼 아무거나 눌러 한방에 400페소로 불려 온 그들이었다. 

  

the green roof @El Calafate, Argentina


  다음날 우리는 그들이 지나온 바릴로체로 갈 버스 티켓을 알아보러 또다시 린다비스타에 들렸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들을 발견했다. 내일이 없이 다닌 셋 중 둘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 쯤 유럽에 있어야 한다며 헤헤하고 웃어 보였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비행기마저 칼라파테의 기상악화로 이착륙을 하지 못해 일정에 차질이 생긴 모양이었다. 항공 티켓을 새로 구하자니 임박한 일정이라 값이 비싸서 버스 편을 알아보았더니 시간 대비 썩 좋은 가격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항공사로, 우리는 버스터미널로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아쉬운 이별을 맞았다.


F1.4 @El Calafate, Argentina


  남자친구와 고향이 같았던 막내가 얼마 있지 않아 먼저 귀국을 하고, 우리가 남미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두 달 만에 거의 마지막 목적지인 페루에 도착했을 때, 그녀들은 두 달 동안 우리가 일주일 만에 달렸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브라질 곳곳을 여행하다가 처음 여행을 시작한 에콰도르로 다시 날아가 중미를 거쳐 미국 서부로 올라가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한국에 돌아와 병간호 한 달, 구직 한 달 후 오늘로부터 이주 전 직장을 얻어 자리를 잡았을 때 그녀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 우리 한국 왔어!


  6개월 만에 정처 없던 여행을 마친 그녀들은 프리다이빙 강사인 남자친구에게 다이빙을 배우고싶다며 연락이 와서는, 또 여행을 가고 싶은데 잔고가 바닥이 났다며, 취직을 했는데 때려칠까 고민중이라며, 꼭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것만 같았다.


soft, deep scarlet @El Calafate, Argentina


  내가 마주했던 칼라파테의 하늘은 늘 선홍빛으로 물들며 졌다. 칼라파테에 머무는 동안 저녁 준비를 하다 말고 남자친구와 나는 카메라를 가지러 여러 번 방으로 뛰었다. 피츠로이의 일출만큼이나 짧고 강하게 지나가는 그런 순간이었다. 바릴로체를 향하는 버스에 올라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보며 열흘간의 칼라파테를 하나하나 마음손으로 붙잡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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