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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슌 Oct 0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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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찰텐 -3

  아껴도 모자란 여행 시간 중에도 지키지 못한 이른 기상 시각쯤 하산을 시작했다. 짧은 시간 붉게 물들었던 피츠로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여운을 남겼다. 산을 내려오던 길에 전망대에서 반팔티셔츠 차림의 미국인 여행자 셋을 만났다. 한 남자는 이미 하얘져버린 피츠로이를 촬영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남자와 여자는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Bon dia." 나는 그들에게 춥지 않은지부터 물었다. 반팔의 차림이 꼭 '캡틴 아메리카'를 연상케 하던 그 남자는 "글쎄 뭐, 좀 쌀쌀한 것 같기도 하네."라며 으쓱해보였다. 그러자 사진을 찍던 남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듣자 하니 그녀가 우리가 반팔 입은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나 보네."하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그 시각에 전망대에 도착해 포인세놋을 지나 로스 뜨레스 호수까지 간다고 했다. 엄두도 못 낼 나에게 너희도 가냐 묻기에, 우리는 일출을 보고 하산하던 길이라며 촬영한 타임랩스를 보여주었다. 1시간을 넘게 촬영했지만 결과적으로 1분 조금 넘는 영상에서 피츠로이가 붉게 물드는 하이라이트는 고작 3초, 그들은 탄식을 하며 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서리가 바삭이는 소리가 내렸다. 그 날의 해가 떠오르면 나의 시간은 다시 시작된다. 어느 정도 밝아진 하늘 아래에서 셔터를 누르는 일에 집중하는 순간이다. 그 날은 얼어버린 나뭇잎들이 계속해서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내 주변을 지키는 남자친구의 서벅거리는 발소리와 점점 내리쬐는 햇볕에 서리가 녹아내리는 걸 전부 느끼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산을 오를 때 포기했던 전망대 길로 돌아 내려오며 뒤를 돌아보니 백색의 피츠로이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 샛길로 빠져 발견한 장소에 멈춰 서, 휴대폰 지도를 켜고 '돌로 된 평지, 트인 시야. 전망대보다 나음.'이라고 메모를 적어 핀을 꽂았다. 내일은 이곳으로 오는 것이 어떻겠냐며 자연스럽게 재산행을 결심했다.



  숙소 앞에 다다랐는데 라면을 반개씩 끓여먹는 그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내일 칼라파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예약하러 간다고 했다. 몸을 질질 끌며 남자친구를 붙잡고 늘어지던 나는 생동한 그녀를 보고 왠지 모르게 아예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점심을 차릴 힘도 없던 나는 숙소 1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스테이크를 두덩이 주문했다. 어차피 여행 끝날 때 까지는 보지도 못할 내 필름사진은 잊고 남자친구의 사진과 타임랩스를 구경하며 우리의 날씨운과 5시간짜리 산행을 무사히 마친 나를 스스로 기특해하고 있을 때였다. 화장실에 간다던 남자친구가 웬 거지 한 명을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


  아마 내가 안경을 안 썼더라면 멀쩡해 보였을 백인 여행자였다. 남자친구는 다짜고짜 휴대폰으로 촬영한 거지의 여권을 보여주었다. 워낙에 말수가 적은 남자친구는 "얘기 좀 들어봐."라며 시작과 동시에 말을 끝냈다. 거지는 내게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갑을 도난당해 당장 숙소도 식사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며, 페이팔로 입금을 해줄 터이니 자신에게 현금으로 줄 수 있겠냐 물었다. 그는 필요한 돈이 60불 정도라고 했고,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를 전적으로 믿어서가 아니라, 혹여 그가 거짓말을 하고 나에게 사기 치는 것일지라도 여행자로 보이는 그를 굶게 하고 싶지 않았다. 페이팔 아이디로 물건을 사본적은 있어도 돈거래를 해본 적은 없어 나는 방법을 모르니 네가 진행해보라며 내 옆에 앉을 것을 권하자 그는, "정말 괜찮겠어? 나는 지금 몸에서 냄새가 나고 더러워."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그는 내 아이디로 본인 계정에 요청을 하고, 자신의 계정으로 승낙을 눌러 거래를 성사시켰다. 계속해서 틈이 날 때마다 믿어줘서 고맙다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이 구글에도 검색된다고 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나중에 따져보니 그가 온라인으로 보내준 달러보다 조금 덜 되는 페소를 현금으로 받아 그는 재빨리 떠났다.



  그가 떠나고 터미널에 갔던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며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아! 저 그 사람 본 것 같아요 방금 앞에서. 태양열로 휴대폰 충전하고 있던데요? 정말 힘들게 여행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게. 여권도 찍으라더니 자기가 구글에 나온다는 거 있지, 참."이라고 말을 하다가 문득 정말 검색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노트북을 켰다.



  그의 이름은 맥스 라이브Max Rive. 검색되는 사이트가 있어 들어가 보니, 개인의 산악사진 페이지였다. 총 10번의 수상경력과 함께 방금 만난 거지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경이로운 사진들에 빠져 스테이크는 멀리 치워두고 한참을 구경하다가 연동된 인스타그램으로 들어가니 팔로워 수가 무려 22만 명이 넘는 인기 많은 사진가였다. 남자친구는 그제야 내게 "어쩐지 엄청 좋은 삼각대를 들고 있더라."라고 했다. 나는 내 필름카메라로 그의 모습을 담지 못한 것을 아직도 후회한다.


http://www.maxrivephotography.com/index

https://www.instagram.com/maxrivephotography/



  그때로부터 네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페이팔로 받은 돈을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나는 그날 인스타그램으로 그에게, 따져보니 너무 적은 돈을 주어 미안하다며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냈다. 그로부터 3일 후 "Hey Hero,"라고 시작되는 장문의 메시지를 받았다. 끝까지 자신의 험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믿어줘 고맙다던 그의 말에 내가 더 세상에 고마웠다.


  찰텐에서의 셋째 날 아침 새벽, 조금 더 멋진 타임랩스를 찍자던 우리는 둘 다 골골대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쉬어야겠다 눈을 감았다. 그렇게 찰텐에서의 따뜻한 3일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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