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찰텐 -2
붉은 피츠로이 구경에 실패하고 숙소로 돌아가 일출을 계획했다. 또다시 계란을 삶고 가방을 꾸렸다. 체력적으로 패자인 나로서는 왕복 8시간은 생각해야하는 거리였다. 뉴질랜드의 최남단보다 조금 더 아래에 위치한 찰텐의 아침이 9시가 넘어야 시작되는 추운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정상을 오르자고 맞춘 4시30분 알람은 꺼버리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7시, 출발하지 않으면 일출 전에 전망대에도 도착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옆 침대에 누워 책임회피식으로 안갈거냐 묻는 네게 간다고 성질만 부렸다, 누워서. 매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네가 미웠던 것이다. 그 어둠 아래 멀찍이 떨어져 걸으며 요거트를 묵묵히 먹는데 네가 다가와 미안하다며 나를 안아줬다. 어찌나 내 자신에게 화가 나던지 욱한 마음에 차오른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올려다본 하늘에 별이 쏟아진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2016.06.30
네시 반 쯤엔 일어나야지만 동이 트기 전에 포인세놋Poincenot을 지나 로스 뜨레스 호수Laguna de Los Tres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지만, 알람이 울리고 잠귀가 어두운 남자친구는 알람을 채 듣지도 못했다.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다시 눈을 떠보니 두시간 가량 지난 아직 깜깜한 아침이었다. 나긋이, 게으른 말투로 남자친구를 불렀다.
정말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가끔 나를 기다려주는 것을 불필요한 일로 치부하는 남자친구가 미웠다. 함께 외출을 하기로 하면 머리 손질에 시간이 더 많이 드는 내가 무조건 본인보다 먼저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날도 그렇게 건너편 이층침대 아랫칸에 누워 머리털 하나 까딱 않고 내게 "안 가?" 하고 묻는 남자친구에게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일어나기 싫어 예정보다 두시간이나 더 누워 게으름을 피웠는데, 먼저 일어나 나를 살랑살랑 다정하게 깨워주면 정말 안되는 것인가 싶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정말 하루를 망칠 것 같은 생각에 벌떡 일어나 입을 대빨 내밀고는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전날 꾸려놓은 가방을 메고 공용 부엌으로 가 아침으로 준비해 둔 요거트를 챙겼다. 부엌에서 나오자 전날 가볍게 인사를 한 한국인 여동생이 느긋하게 아침으로 라면을 먹고 있었다.
끼이익~
란쵸 그란데 호스텔Hostel Rancho Grande의 문이 무거운 소리를 냈다. 숙소를 나와 추운지도 모르고 쭉 튀어나온 입 안으로 차가운 요거트를 떠밀어 넣었다. 나는 화가 나거나 토라지면 그것이 바로 걸음걸이에서 나타나는데 1년 반을 함께 걷다 보니 자연스레 이를 알게 된 남자친구가 앞에서 사진을 찍다 말고 뒤돌아 내게 왔다. 화가 나면 앞서 가지만, 내가 한참 뒤에 있다는 것은 토라졌다는 뜻이었다. 남자친구는 현명하게도 별이 수북한 그 하늘 아래에서 나를 안아주며 영문도 모른 채 미안하다고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앞서가는 남자친구 손에 들린 손전등 불빛에 그림자들이 춤을 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두 그림자만이 일정한 속도로 흔들흔들, 나는 시공간에 갇혀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만 같았다. 시야가 좁아지니 자연스레 소리와 냄새에 증폭기를 세우고 지레 겁을 먹었다. 껌껌한 수풀에 생명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손을 더듬어 남자친구의 옷자락을 덥석 붙들었다. 온 사방에서 소란한 어둠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언니 오빠예요?" 어둠이 아니라 그녀였다. 우리가 숙소를 떠날 때 분명 라면먹기를 막 시작하던 그녀가 우리를 따라잡은 것이었다. 벌써 숨이 차던 나는 더딘 말투로 그녀에게 인사했고,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녀의 빠른 속도보다 놀라웠던 건, 통통 튀는 듯한 발걸음과 평행선을 이루는 그녀의 기운이었다.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 캄캄한 괴물에 사로잡히는 동안 그녀는 그 어둠을 친구 삼아 산뜻한 산행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간 후, 나는 더 이상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별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별을 보는 척 몰래 숨고르기를 서너 번, 어느새 별이 많이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어슴푸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아까의 어둠은 온데간데없고, 이대로라면 도착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나는 자처해 뛰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함께 힘차게 달렸다.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려 카프리 호수Laguna Capri에 다다랐지만 피츠로이Fitz Roy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전 갈래길에서 이미 지대가 낮은 호수 쪽을 택한 후라 반대편 전망대로 가려면 꽤나 돌아가야 했다. 우선 고지대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남자친구는 특기를 살려 서리 덮인 마른 수풀을 헤쳐갔다. 그러는 사이, 등 뒤에서 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비집고 들어가기도 힘든 나무 위에 남자친구는 휴대폰으로 타임랩스를 틀어 가까스로 올려놓았다. 나는 조금 더 올라가 돌로 된 봉우리를 찾았다. 돌 틈 사이 고인 물이 작은 빙판이 된 옆에 깔개를 깔고 앉았다.
5월 말, 겨울이 시작되고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지만, 마치 페인트를 부어놓은 양 깨끗했다. 뷰파인더를 통해 한참을 바라보다가 답답한 마음에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멈춘 듯한 시간의 변화를 온전히 내 두 눈으로, 내 기억 속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