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찰텐 -1
5월 18일에 여행을 시작해 5월 25일, 딱 일주일 만에 5,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는 당연히 페리토 모레노 빙하Glaciar Perito Moreno였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위치한 파타고니아의 절정인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국립공원 W 트래킹과 비수기에는 날씨가 좋아야만 볼 수 있는 붉은 피츠 로이Fitz Roy가 그다음을 이었다. 5월 말까지 운영하는 빙하 미니트래킹은 신청을 할 수 있었지만, 당시 기상상태로는 W 트래킹은 전문장비와 함께 이동수단과 산장의 운영 중지 상태로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했다. 빙하 미니트래킹 투어를 신청하러 갔다가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당일투어를 간다는 여행자를 만나 그녀의 후기를 듣고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후, 두 번 다시 그녀를 보지도, 그녀의 소식을 묻지도 못했지만, 찰텐에서 머무른 사흘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찰텐에는 따로 투어가 없었고, 개인이 코스를 따라 그 산세를 전망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었다. 크게 나누자면 또레봉Cerro Torre을 보는 길과 피츠로이Fitz Roy를 전망하는 코스였는데, 찰텐에 도착한 아침에 구름이 걷히기 시작해 숙소에 짐을 대충 풀고 그나마 짧고 가벼운 또레봉 전망대로 향했다.
위아래로 길쭉한 마을에서 서쪽에 위치한 또레봉 전망대로 갈 수 있는 길은 서너 갈래쯤 되었는데, 정해진 여정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친구는 감을 따라 무작정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겁이 많은 나는 오프라인 지도를 눈에서 떼지 못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따스한 볕 아래 길도 없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니 땀이 났다. 티셔츠 한 장을 남기고 윗옷은 다 벗어버린 채로 한참을 걷다 보니 '또레호수로 가는 길Senda A Laguna Torre' 표지판을 발견했다. 내가 이를 반가워하는 사이 남자친구는 표지판 옆으로 난 길을 그대로 가로질러 다시 마른나무들이 무성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닦여진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파르다는 느낌만 가진 채로 가시나무라도 밟을까 산 바닥만 보며 울며 겨자먹기로 언덕을 올랐다. 분명 고개를 들면 보이는 저 언덕만 넘으면 정상일 것만 같았는데 오르면 오를수록 끝이 없었다. 가빠진 숨을 고르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을보다 더 아름다웠던 것은 반대편 산등성이에 걸친 구름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또레호수 트래킹 코스를 가보지 못했지만, 남자친구의 결정을 따라 힘들게 오른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골짜기를 따라 난 트래킹 코스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리라 믿는다.
조금 더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니 캠핑장으로 사용할 법한 평지가 나왔다. 저 멀리 구름 속에 모습을 숨긴 봉우리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칼라파테에서 2시간가량 차를 타고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선명하던 산봉우리들이 구름에 갇혀있는 걸 보니 비만 맞은 브라질이 생각이 났다. 당연한 얘기지만 비수기는 비수기인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십여분 조금 더 걷다 보니 서서히 구름이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또레봉이 아닌 피츠로이였다. 마침 도착한 곳엔 이 길의 끝을 알리는 듯한 기괴하게 휘어진 나무가 절벽의 시작을 알리고 있어 그곳에서 다짜고짜 휴식을 선언했다.
붉은 피츠로이여야만 했던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떠올라 일몰을 보고 내려가자는 심산으로 준비해온 삶은 계란을 까 입에 넣고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남자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여유를 느끼는 것도 잠시, 손발이 시려오는데 일몰까지는 한시간 가량이 남았다. 그래도 이왕 힘들게 올라왔는데 일몰은 보고 가자며 해가지는 모습을 타임랩스로 남기려면 삼, 사십 분 전에는 촬영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조금을 더 버티다가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을 시작한 지 삼십분이 넘어가고, 급기야 나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구름이 높이 올라가 피츠로이는 선명히 보였지만 지는 해를 구름이 모두 막아버려 그늘 아래의 피츠로이만 한시간을 구경했다. 그러다 떠오른 것은, 억울하게도, 붉은 피츠로이는 일몰이 아니라 일출이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