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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윤 Sep 05. 2016

새똥테러

부에노스 아이레스

  드디어 해가 뜬 날씨에 기뻐 날뛰며 아르헨티나 국회의사당의 에메랄드빛 지붕을 연사하고 있을 때였다. 각자 원하는 사진을 찍다보니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남자친구에게 현지 대학생으로 보이는 무챠챠muchacha가 말을 걸고 있었다. 남미의 큰 도시인만큼 치안을 우선적으로 걱정했지만 친근해 보이는 앳띤 얼굴이 싱긋 웃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말을 못 알아듣는지 그녀가 손짓을 크게 하며 남자친구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고 했다. 걱정이 되었다기보단 궁금함이 앞서 그들 뒤를 따라가며 지켜보니, 남자친구에게 뭔가 많이 묻었는지 휴지를 꺼내 닦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새똥을 맞았다는 꽤 많은 수의 여행후기를 봤던 터라 웃음이 났다. 그녀는 남자친구를 가까운 공원 벤치로 데려가 가방에서 물티슈와 휴지를 꺼내 도움을 주고 있었다.


오빠! 새똥이야? 진짜로 새똥을 맞은거야? 큭큭.


  내가 다가가자 그녀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가리켰다. 내가 둘러메고 있던 필름카메라 스트랩에도 새똥이 있었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집중해서 사진을 찍으면 새똥을 맞는지도 모르지 싶었다. 착한 그녀가 내 카메라를, 내가 남자친구의 등을, 남자친구가 새똥범벅이 되어버린 물티슈로 자신의 손을 닦는 정겨운 장면이었다. 그녀가 국회의사당 꼭대기를 가리키며 스페인어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지만, 하늘에 있는 새를 말하고 있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others' eyes @Buenos Aires, Argentina


  남자친구와 내가 "Gracias(고마워)."를 연신 내뱉으며 그녀가 주는 물티슈와 휴지로 서로를 닦아주자, 그녀는 남자친구의 어깨 쪽을 닦아주며 가방을 벤치에 내려놓으라 손짓했다. 그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그녀의 가방도 버젓이 벤치 위에 올라가 있었지만 우리에게 가방과 카메라를 벤치에 자꾸 내려놓으라 하고 국회의사당이 있는 하늘을 가리키며 우리의 시선을 벤치로부터 분산시키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벤치 위에 있던 남자친구의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를 닦아주는 시늉을 하며 내 수중에 있는 남자친구의 가방, 내가 메고 있던 내 가방, 내 보물 1호 필름카메라를 가리지 않고 자꾸만 벤치에 내려놓도록 유도했다. 포기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계속 휴지를 꺼내 들고 나를 챙겨주는 척 굴길래 "No, Gracias(괜찮아, 고마워)." 단호히 말했다. 완강한 태도에 그녀는 실패를 직감했는지 '내가 지금 엄청난 호의를 베푸는데 너희들이 이런 식이라면 어쩔 수 없지 뭐'라는 표정을 연기하며 새똥인지 겨자인지 모르겠는 것들을 닦아낸 물티슈를 굳이 내 손에 억지로 쥐여주더니 자신의 가방을 챙겨 떠났다.


the Plaza @Buenos Aires, Argentina


  한참 전부터 주변을 서성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려보이던 남자가 태연하게 그 무챠챠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헛웃음이 났다. 그녀가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면 가방을 들고 튀려던 놈이구나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새똥보다 더 닦기 힘든 정체모를 소스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마트에 장을 보러 들어가 서로를 자세히 훑어보니 어이가 없었다. 새가 땅바닥에 누워 똥을 쏘기라도 했는지 남자친구 엉덩이에도 그녀의 새똥이 묻어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녀의 미소에 홀딱 반해 휴지로 이어진 손길에서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오던 정체모를 소스를 새똥이라 감쪽같이 믿어버린 내가 너무 웃겼다. 숙소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하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흔한 일로 여행자들이 주 타겟이고, 주말에 활동이 왕성한데 우리가 마침 딱 그런 상황에 들어맞았다며 그래도 대처를 잘 해 다행이라고 했다.


La familia @Plaza de Mayo, Buenos Aires, Argentina


  새똥사건으로 불신이 가득 생긴 우리는 등에 매달려있는 가방조차도 어찌 못하고 안절부절 산텔모 시장으로 출발했다. 사람도 많고 소매치기도 많은 곳이라는 숙소 주인장의 말에 남자친구는 카메라도 숙소에 놓고 나온 길이었다. 다행히도 햇빛이 따스한 날씨가 불안한 마음을 작게나마 정화시켜주었다.


Perú Station @Buenos Aires, Argentina

  새똥테러를 당한 국회의사당Congresso역에서 6 정거장을 지나 5월의 광장Plaza de Mayo역으로 가는 동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것은 리마Lima와 페루Perú역을 지나서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하철에는 리우데자네이루Río de Janeiro도 있고, 우루과이Uruguay, 베네수엘라Venezuela 등 남미의 국가명과 도시명으로 된 지하철 역이 많았다. 우리나라에도 오사카역, 상하이역, 타이베이역이 있으면 얼마나 색다를까 상상해봤다.


  이렇게 다른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라에서 이들만의 것을 눈여겨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수많은 다른 것들 중 가장 좋았던 것은 그곳의 공기였다. 숨을 잘 쉴 수 있었다, 혹은 탁해서 은근 마음에 들었다, 가 아니라 그 땅에 내리쬐는 볕, 도시들이 머금은 분위기, 그곳을 채우는 사람들의 색, 그런 것들 말이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도 찍었을 만한 사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보이는 까닭이 아닐까.


Via Defensa @Buenos Aires, Argenina

  산텔모 시장엔 골동품, 수공예품, 군것질거리, 없는 것이 없었다. 재정적 여유가 없는 우리는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하면서, 그래서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둘러보기도 하며 1.3km를 걸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시는 나의 아버지를 위해 예비사위는 철제 질레트 골동 면도기를 골랐다. 걷다 보니 사고 싶은 것들 투성이었지만, 우리는 물욕이 아닌 가방에 빈 공간이 없으니 지름신을 하늘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이제 시작인 남미여행을 천리행군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시장 끝자락에 다다라 길거리 탱고를 보고 리듬에 맞춰 춤추는 마음을 하고 왔던 길을 돌아가다가 어느 점포에 다시 들렸다. 각국의 동전으로 공예를 하는 아저씨의 점포였다. 유일하게 내가 사고싶었던 것이었는데,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해 구경만 하다가 발걸음을 옮긴 것이 아쉬워 다시 향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쏙 드는 동전을 찾지 못했다. 우리가 처음 구경할 때 "De dónde son?(어느 나라 사람인가요?)"이라는 아저씨 질문을 용케 알아듣고 "Coreano!(한국인이에요!)"라며 짧은 대화를 나눴었는데, 두 번째 방문에 그는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동전을 골라야 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나는 지갑을 뒤져 우리나라의 100원짜리와 500원짜리 동전을 찾아 건네며 "Presente(선물)!"하고 말했다. 언젠가, 누군가 나처럼 아쉬워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햇살 아래에서 어이없게 당한 새똥테러와 큰 기대가 불러온 한인숙소에 대한 적지 않은 배신감을 뒤로하고, 골목마다 흘러나오는 경쾌한 라틴음악에 기분을 맡기고 꼭 잡은 두 손으로 거닌 5월의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아직도 생생하다.


the edge of the day @Feria de San Pedro Telmo, Buenos Aires, Argen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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