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3개월 전부터 택배 분류택배분류 알바를 시작했다. 택배알바를 시작하며 배우고 느낀 것이 많아 꼭 글로 기록하고 싶었다. 하지만 택배알바에 대해 얘기하려면 일단 '멀쩡하지 않은 나'에 대해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이야기는 엉망이었던 내 삶에서부터 시작되니까!
<택배알바하는 그림책테라피스트>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퇴사하고 4년을 보내고 직면한 내 모습은, 본업으로 생활비조차 못 버는 가난한 프리랜서. 게으름과 무기력으로 일은커녕 일상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 이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신과에 가고, 택배알바도 시작했다. <택배알바하는 그림책테라피스트>는 좋아하는 일로 먹기 살기 위한 과정이자 한 어른이자 한 사람으로 잘 살아가고 싶은 내 삶의 여정기.
나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꽤나 멀쩡한데!
별로 멀쩡하지가 않다.
택배 분류택배분류 알바를 시작했다.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고, 또 일상을 만들고 지켜가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뻔히 공부 잘하고 졸업해서 직장도 다니고, 퇴사해서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잘 사는 것 같던 애가 왜 이러고 살고 있냐면(!) 꾸준하게 일하는 게 어려웠다. 우울하면 일을 멈추고, 무기력해지면 멈추고, 하기 싫으면 멈추고 그랬다. 그렇게 인생을 책임감 없이 산 결과. 알바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내 컨디션과 감정에 상관없이 성실히 일하고 적은 돈이어도 꾸준히 버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다른 사람이랑 연결된 일은 성실하게 한다..!)
작년부터는 밤에 일찍 잠들기 위해서 수면제를 먹는다. 수면제 얘기에 흠칫 놀란 주변 사람들을 보며, 이것도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의 야행성 기질과 오랜 프리랜서(라 쓰고 반백수라 고백한다)의 생활이 시너지를 일으켜서 밤 12시 전에 잠드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수면 패턴을 잡으려는 각고의 노력 끝에 결론이 정신과에, 수면제였다. 그런데 사실 수면제를 먹는 것조차도 미션처럼 어렵다. 먹으면 잘 텐데, 일찍 자고 싶으면서도 잘 안 먹는다.
그런 거 뭔지 아나. 눈앞에 약이 있고, 약 먹을 시간인 걸 봤고,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걸 하기 싫고 못하겠어서 안 하는 아이러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변명이다, 의지박약이다' 할 수 있는데, 나는 삶의 의지를 다부지게 가지고도 눈앞의 뻔히 하면 되는 일을 제대로 못한 날이 많았다. 약 먹는 일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잘하고 싶은데 안 되는 게 많았다. 나도 이런 내가 이해가 안 돼서 많이 괴로웠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김수지는 왜 이렇게 멀쩡한 것 같은데, 안 멀쩡할까!
왜 보통만큼 사는 것도 어려울까!'
어렸을 때는 나의 멀쩡함을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내가 멀쩡한 줄 알았는데,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이상한 부분은 계속 이상했다. 그 이상함들이 결국 내 삶을 무너뜨리고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다 내려놔진 후에게 나의 멀쩡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그 후부터 조금씩 멀쩡해지고 있다. 다만, 나의 멀쩡하지 않음을 직면할 때마다 느끼는 황망함은 계속 진통처럼 괴롭다.
알바에 약까지 먹어가며 생활패턴을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일상이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잘 자는 것과 알바에 집중하니 진짜 해야 하는 본업은 또 뒤로 밀렸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마음먹고 일을 좀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랬더니 생활패턴이 또 망가졌다. 일하다가 매일 새벽 5시가 넘어서 잤다. 늦게 자도 알바가 있으니 일찍 일어나야 해서, 새벽 5시에 자고 아침 7시에 일어나기를 며칠 동안 반복했다. 그런 괴랄한 일상.
'왜 여전히 일상과 일을 제대로 병행하지 못할까'
지난주에는 자괴감이 엄청 들었다.
그래도 또 지금의 내 모양대로, 일상과 일을 조율하며 붙잡으려 노력한다. 어제부터 알바를 하고 집이 아닌 카페에 가서 일을 하는데 좋은 방법 같다. 어차피 이제 삶을 포기하거나 멈출 생각은 없어서 내가 처한 상황에서 조금 더 나아지는 선택들을 노력하고 연습한다.
삶에 큰 사건도 없었음에도 '나로 살아가는 것' 이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꾀병 부리는 걸까봐 오래 고민했는데, 이정도 힘들어보니 인정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생의 의지 없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예민한 김수지를 살려내고 살아가게 하느라 정말 고생했다. 김수지로 나만큼 살아온 거 너무 대단해.
후.
나의 멀쩡하지 않음에 대해서 작년부터 쓰고 싶었는데, 이게 뭐라고 진짜 어려웠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진짜 나를 멀쩡하지 않게 볼까봐. 스스로 멀쩡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하자 있는 사람으로 판단받는 게 무섭고, 내 민낯이 들통나면 수습하기 위해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왜 이렇게까지 나 자신을 까발리고 사는지도 다 이해되진 않는다.
근데 이번 생은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고, 이렇게 살 것 같다. 내 못난 모습을 고백하고, 드러내고, 고민하고, 풀어가고.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공감하고, 대화하고.
모쪼록 요즘엔
나의 멀쩡치 못함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뭉개진 자리에서부터 다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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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ㅣ시샘
낮에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테라피스트
아침에는 택배를 분류하는 생존형알바생
그림책이 너무 좋아서 집방구석에 그림책방을 만들고, 어른들에게 그림책을 읽히는 그림책테라피스트가 되었다. tvN과 KBS 방송 출연도 하고, 여러 매거진에도 소개되며 금방 성공할 줄 알았으나, 현재 택배분류 알바를 병행하고 있다. 꿈은 유퀴즈 나가서 어른들한테 그림책 영업하기!
시샘의 인스타그램 @poetry_p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