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복수전공 과목에서 만나 친하게 지낸 태국인 친구(K라고 부르겠다) 가 있었다. 타 과, 그것도 예체능 출신의 나와 한국어가 다소 서툴었던 외국인 친구를 다들 조별과제원으로 함께하고 싶지 않아하는 바람에 우리는 처음 이어졌다. 깍두기 끼리라도 모여 조별 활동은 해야하지 않겠냐는 교수님의 명령에 우린 울며 겨자먹기로 한 조가 되어 숱한 날을 고군분투했다. 우리를 외면했던 헤이러(Hater)들을 향한 일말의 복수심과 반드시 해내보이겠다는 힙합가수 같은 일념으로(그놈의 증명 의식) 우리는 결국 말빨로 난다 긴다 하는 해당 과의 성골들을 제치고 복수전공&외국인학생 조합으로 A+를 받을 수 있었다. 마이너들의 승리였다! K는 그 후로도 내가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 주었고, 복수전공에 교직까지 힘겨운 코스모스 졸업을 하느라 과 동기가 거의 없어 외로웠던 나의 4.5학년 하계 졸업식에도 유일하게 참석해 축하해준 친구였다. 우린 졸업 후에도 간간이 연락을 하며 지냈고 잊을만 하면 만나 커피 타임을 가졌다. 몇 년 뒤, 한국의 1군 IT회사에 다니던 그 친구는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다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여유롭고 소박한 방콕 일반 가정 출신의 타국인은 효율성과 극 자본주의의 도시 서울이 버겁다며 다신 이곳에 눌러 앉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의 앞날을 축복하며 우리는 둘만의 송별회를 가지기로 했다.
친구가 자취했던 홍대에서 마지막 짐정리를 마친 날 우린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대학때의 얘기로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우리만의 아름다웠던 송별회가 끝나고 추억에 흠뻑 젖은 난 집에 돌아온 뒤 그 친구를 처음 사귀게 됐던 일화와 함께 친구를 보내는 섭섭한 심정에 대해 장문의 글을 작성해 페이스북에 게시했다. 대학시절 때 찍었던 우리 사진을 예전 휴대폰에서 찾아 올리는 정성까지 보인 뒤 친구를 슬쩍 태그했다. 글엔 내 지인들의 수많은 '좋아요' 가 찍혔고, 태그로 소환당한 당사자 친구도 글을 보곤 댓글을 남겼다. 한국말이 유창했지만 묘하게 서툰 느낌이던 외국인 친구의 단 다섯 글자 댓글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윽! 오글오글!"
누가 우리 K에게 그런 말을 가르쳤어? 댓글을 보는 순간 우리의 우정은 나만의 짝사랑인 것처럼 느껴졌고 얼굴이 화끈해졌다. 넌 이런 내가 창피하니...? 쥐구멍이 있다면 달려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유독 장난기가 많고 작은 어색함도 못 견뎌하는 활발한 친구라 내가 이런 글을 쓴 것이 꽤나 고문이었나 보다. 이미 너무 많은 좋아요를 받아서 이제와 글을 내리기도 그렇고, 타격 없는 쿨한 사람인 척 했지만 난 의외로 소심한 인간이다. ‘뭐가 오글거려, 내가 너와의 만남을 추억하고 싶다잖아! 우리 몇 년간 못 본다고!’ 쑥쓰러웠을 친구의 진심을 알지만 그 때부터 새삼 ‘오글거린다’는 단어가 꼴보기 싫어졌다. 그 단어가 없을 때는 다들 뭐라고 말했길래 대체어 조차 떠오르지 않는 거지. ‘낯 뜨겁다’거나 ‘화끈거린다’,’쑥쓰럽다’ 의 감정이 복합된 상황에서 쓸 법한 말들은 ‘오글거린다’는 표현으로 압축되면서 어쩐지 간질거리고 숨어버리고 싶은 순간을 의미하게 된 것 같다. 나만의 느낌인지는 몰라도 ‘오글’의 어감 안에는 ‘묘하게 촌스럽고 세련되게 표현되지 않은 그 어떤 감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언제 이 말을 자주 썼었던가를 되짚어 보니, 대체로 정제되지 않은 ‘감정 과잉’의 상태일 때를 뭉뚱그려 사용한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예컨대 내 취향 안에서 자이언티나 크러쉬의 읊조리듯 일상의 단어를 툭툭 내뱉는 창법은 세련된 것이고 임창정이나 SG워너비처럼 ‘사랑해서 일분 일초도 못견디겠고 죽은 뒤 하늘에서도 만났으면 좋겠고 나 죽어어억’ 하는 류의 야생에서 건져올린 날 것 같은 과잉 감정은 오그라드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의 ‘오글오글’ 이라는 표현이 더 창피하게 느껴졌나 보다.
30대가 되고 보니 일상에 ‘더하기’보다는 ‘덜어내기’와 ‘질’을 중시하게 된다. 작게는 먹는 것, 입는 것부터 크게는 내가 사는 공간까지 덜어내고 비워내지만 대신 조금 더 품격있고 역사가 있고 스토리가 있는 것들에 매력을 느낀다. 입고 먹고 사용하고 누리는 것에 나만의 기준이 생기고, 변화보단 고급스러움과 안정을 중시하게 됐으며 오래 가지만 개성있고 질리지 않는 것들이 내 생활에 주를 이루게 됐다. 한마디로 ‘오글거리지 않는 삶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미래였다. 지마켓과 지하상가에서 7900원짜리 동대문표 티셔츠를 5장 사입던 20대 초반을 지나 나름의 브랜드 가치가 있는 12만원짜리의 티셔츠 한 장을 입게 되기까지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진심은 최대한 꽁꽁 숨겨두고 곳곳에 단서를 숨겨두는 것이 세련된 것이며 글을 쓸 때도 뻔한 진행보다 변주나 반전을 두는 것이 치밀한 것이고 떠오르는 감정은 꼭꼭 씹어 삼켜 나 혼자 소화시키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더 영리한 것이라 생각해왔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때론 이 오그라드는 날것의 감정을 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진짜 나만의 감정 아닐까. 내가 그토록 열광했었던 ‘아프냐, 나도 아프냐’ , ‘이 안에 너 있다’ 같은 추억속 대사들은 지금 보면 촌스럽고 오그라들지만 그 때 느꼈던 감성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고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은 없다. 그동안 ‘오글거림’과는 거리가 먼 담백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으며 외면해왔지만 이젠 인정해야겠다. 어느 시점이 됐든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으며 또다시 돌아간다 해도 감정 과잉이 되어 오그라드는 가사에 눈물을 흘리며 소몰이 노래를 목청 터져라 부르는 사람 중 하나는 분명 나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