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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편리 Oct 11. 2023

2. 내가 무슨 헤르미온느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표준으로 두는 시기보다 몇 박자 늦게 대학생이 되었다. 사실은 처음 들어갔던 대학이 지망했던 곳이 아니어서, 원하는 학교에 입학해보겠다며 한 번 더 입시를 치렀다.

그렇게 난 스물 두 살에 또다시 1학년이 되었다.


나름 마음 고생 끝에 입학한 대학이라 그런지, 그저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만이 나의 지나간 시간을 보상해 줄거라 생각했다. 나는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사실 그래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다.

입학 후 첫 신입생 연주회를 한 이후로 '나는 노래보단 공부를 더 잘 해서 붙었구나' 확신했다.

아니, 대한민국에 노래 잘 하는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심지어 나처럼 재수 삼수가 아닌 현역으로 붙은 동기들 중엔 고3때 '음악 선생님의 권유로' 노래를 시작해서 불과 총 노래경력 6개월, 간단한 악보조차 못 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애들이 노래를 오래 해 온 나보다 실기 점수가 높다고? 허망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어린이 합창단 단원을 시작으로 동요레슨, 성악 입시 레슨, 마스터 클래스 여름방학 성악 캠프까지 수많은 레슨에 돈지X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들어간 대학인데! 1학년 3월 첫 날부터 노래로 밥 벌어먹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며 초조해졌다. 이런 한톨 만큼의 재능도 재능이라고, 밤낮으로 일해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부터 드는 게 당연지사였다. 집이 어려우니 공부만 열심히 해보자는 권유에도 철없이 노래하겠다고 떼를 썼던 나의 10대 시절이 파노라마로 스쳐갔다. 워낙 타고나게 뛰어난 친구들이 많다 보니 실기 점수로 장학금을 받는 것 또한 어려울 것 같았다. 부모님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려면 최대한 장학금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나는 전공 실기 과목 보다 교양 과목에서 점수를 따는 것에 전력을 다했다.


나의 모교는 '후마니타스' 교육을 전면으로 내세워 졸업하기 전까지 정치, 역사, 과학, 문화, 철학, 시민 교육 등 다양한 인문학을 필수로 수강해야만 졸업이 가능하도록 학제가 꾸려져 있었다. 그것이 내 인생 최초의 인문학 공부였다. 이제와 고백하자니 부끄럽지만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들은 사회철학 시간에 공산주의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렇게 똑똑해지는 기분이라니? 살면서 이렇게 공부가 재밌어 본 적은 없었다. 노력한 만큼 성적이 잘 나오자, 조금 욕심이 생겼다. 기껏 힘들게 대학에 들어왔는데 복수전공이라는 걸 해서 대학 등록금 뽕을 빼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후후... 어떤 과를 들어가서 박살 내 줄까?'

나는 어떤 과를 들어가든지 에이뿔을 받을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에 흥분된 한 마리 음침한 음대 돌아이였다.


수많은 선택지 중 '언론정보학과'가 낙점됐다. 공연예술이나 음악과 가장 맞닿아 있는 것이 영상매체였기에 어떻게든 내 주전공인 음악과 연결지을 거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도대체 뭘 배우는지 가늠이 안 가는 애매한 학과 이름도 내 마이너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헤르미온느처럼 단 하루의 공강도 없이 캠퍼스를 초 단위로 쏘다녔다. 하루는 음대 수업, 하루는 교직 수업, 또 하루는 언론정보학과 수업, 마지막으로 학생회실. 가장 드물게 다닌 곳은 단연코 음대 내의 실기 연습실이었다. 연습 하면 뭐 해... 이번 실기도 뒤에서 세 번째나 네 번째 일텐데. (부끄럽게도 내 뒤의 두 세명은 학교에 거의 안 나와 학사경고를 받은 애들이었다.) 사실상 꼴등이나 다름없는 실기 실력을 올리기 보다 나는 인문학, 그리고 미디어라는 세계에 첨벙 뛰어들어 '뭐가 될 진 모르겠지만 나는 뭔가 된다!' 는 아득한 꿈을 안고 복수전공생이 되었다.


첫 중간고사는 처참했다. 기말고사는 더 처참했다. 언론정보학과에서 높은 학점을 따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말 잘하는 애들이 모두 몰려 있는 거 같았다. 늘 있는 조별 토론 수업에 나는 몇 번이고 어버버 거리다가 앉기 일쑤였다. 여우같은 언론정보학과 애들은 음대 출신인 나를 조별 활동에 끼워주지 않아서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 친구들과 한 조가 되었다. 거기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조장을 맡아 기본적인 한국어도 되지 않는 조원들을 이끌고 험난한 학과생활을 하게 됐다. 마치 으리으리한 군함들 옆에서 신문지로 접은 종이배를 타고 전쟁에 나가는 기분이었다. 교수님 중 몇 명은 내가 성악과라는 걸 알고 발표 시간에 수업과 상관 없는 노래까지 시켰다. 울고 싶었다. 이딴 공부를 왜 하기로 한 거지. 나는 또다시 추진력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게다가 3학년 2학기 쯤엔 내 담당 실기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의 전임 교수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난 담당 교수도 잃은 미운오리새끼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무나 와라... 어차피 노래로 밥 벌어 먹고 안 살 거니까...'  

그렇게 마음 먹고 있던 찰나, 나에게 노래를 지도하실 새로운 강사님이 배정됐다. 따끈따끈하게 독일 유학에서 몇 달 전 막 돌아온 30대 중반의 젊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발성 연습도 대충 해갔던 그 분과의 첫 레슨에서 나는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돌아오는 길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새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가슴에 사무쳐 집에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저 노래 안 하려고요. 지금 교직이랑 복수전공 중이에요.' 혹시나 내게 과도한 숙제나 부담을 안겨줄까봐 선공하듯 내던진 나의 말에 그분이 내게 해주신 말씀은 이러했다.


"너 정말 따뜻한 소리를 가졌는데... 나랑 졸업할 때까지 조금만 열심히 해보지 않을래? 이렇게 열심히 학교생활하는 너라면, 졸업할 땐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 시점에 공부도 노래도, 학교 짱도 이도 저도 아니게 된 나는 선생님의 그 단 한 마디에 한 번 더 노래에 올인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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