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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 some Feb 28. 2023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무시할 수 없는 촉, 쎄이다에 관하여

 줄리언 반스의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8년째 내 책장에 꽂힌 채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주기적으로 '눈에 띈다'. 맨부커 상을 수상한 것치고 꽤 잔잔하고 즐겁게 잘 읽혔지만 그 줄거리만큼은 쓰나미 같았던 책의 내용을 굳이 다시 들춰보지 않아도, 오며 가며 슬쩍 보게 되는 제목만으로 그때그때의 ‘현타’를 함축적으로 요약해 보게 되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이 글은 책 리뷰가 아님을 먼저 밝혀 둡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영어 원제는 ‘Sense Of An Ending’이고 (방금 책을 다시 뒤적거리다가 알았다) 직역하자면 ‘결말의 느낌’, ‘예감’ 정도가 될 것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나는 한국어 버전이든 영어 원제든, 그 의미를 요즘의 단어 하나로 옮겨본다면 ‘쎄이다’가 적합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표준어가 아니고(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쏘이다의 전라남도 방언이라는 말뿐) 인터넷에서 시작된 합성어이다. '쎄한 느낌 + 레이더'를 합쳐 쎄한 촉이 왔음을 말할 때 '쎄이다가 발동한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나는 이 단어가 정말 기발 -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적확 - 하다고 생각한다. 유사어로는 쎄이언스(쎄한 느낌 + 사이언스)가 있다. 언어는 시대를 반영한다, 고 하지 않나. 줄리언 반스의 언어로 쓰인 소설 제목에 (감히!) 지금의 시대를 반영하여 그 둘을 한 번 합쳐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쎄이다는 틀리지 않는다.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우리는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할 때, "실은 처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어 = 쎄했어" (그러고 보면 한국어는 얼마나 경제적인가)라고 할 때가 왕왕 있다.


 가령 내 경우 지인과 애매한 결말을 맞고도 지금까지 영문을 잘 모르고 있는데, 하나 확실한 건 그의 첫인상이 쎄- 했다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떠올리는 분이 있다면 그분 아닙니다. 아마도) 일이 틀어지고 나서야 몇 번이고 머릿속 상영관에서 반복 재생되는 그와의 첫 만남에서 그는 악수를 건네며 ‘아 그 유명한 000, 반갑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그 짧은 순간에 나를 ‘스캐닝’했다. 뭐 나는 유명하지도 않고, 정말 나를 스캔한 건지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첫인상의 눈빛이 심플하게 '반가움' 그 자체의 감정이 아니라 나를 간파하겠다는 눈빛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주로 이런 눈빛을 '눈치 보는 눈'이라고 칭하곤 하는데, 주위를 돌아보면 이런 눈으로 사람을 보는 이들이 꽤 있다(우리 회사에만 많은 건 아니겠지). 우기는 김에 하나 더 보태자면, 일 년 전 쎄한 그 사건 이후로 오랜만에 오늘 또 다른 사람에게서 쎄함을 느꼈는데, 앞서 말한 그 첫 만남에 오늘의 쎄한 주인공이 함께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소오름? 아니 뭘 이런 걸로 다)


 요 며칠은 또 다른 지인이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려 곤경에 처해있는데, 제3자인 내가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없어 그저 마음만 보태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니 모쪼록 잘 해결하리라 믿고 있는데, 다만 이번 일로 너무 크게 상심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았으면 하고 마음으로 빌어볼 뿐이다. 그런데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되짚으며 ‘처음부터 느낌이 이상했다’는 표현이 그에게서 등장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또 한 번 ‘역시 쎄이다는 틀리지 않는군’이라고 맞장구를 쳐보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느낌을 무시한 채로 직진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비난받을 필요는 없다. 잘못은 그쪽에서 한 걸.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모든 건 다 지나고 니서 할 수 있는 결과론적인 맞추기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사이와 사건들에 대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쎄-함을 느끼는 경우가 분명 있지 않은가? 나도 물론 가끔씩 '처음엔 ㅇㅇ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ㅁㅁ 더라구!' 같은 표현을 쓰곤 하지만 사실 더 많이, 더 깊이 알고 보면 정말 'ㅇㅇ'인 경우가 경험적으로 꽤 많았다. 물론 그게 사실이 아니면 좋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쎄이다'가 울리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쎄이다'를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결국 그 쎄함의 끝에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이든 데미지를 입게 되는 건 결국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꿀밤을 맞기도 전에 위로 들린 주먹만을 보고도 움찔하게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주 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들이 미처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신호를 보내주는 건 아닐까 하고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위험한 느낌이 드니까 조심해!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의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 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page 81



 그래서 '쎄이다' 신봉자인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인 것일까? 아니, 일련의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단 ‘고’를 외치는 사람에 가깝다. 역설적으로 ‘쎄한 느낌은 틀리지 않’지만 ‘좋은 느낌’은 틀리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영양제 하나를 먹어도 순작용은 별로 못 느끼지만 부작용은 높은 확률로 겪는 사람이다) 쎄-한 느낌으로 시작해서 결국 새드 엔딩을 맞이하는 경험을 수차례 겪으면서도, 좋은 느낌으로 기대감으로 시작해 꼭 그렇지만은 않게 끝나는 사례들을 굳이 다시 상기시키면서 '쎄이다'가 틀릴 수도 있으니 이번에도 한 번 더 속아보자고 하고 마는 것이다. 아님 말고.


 존 템플턴 경이 ‘이번엔 다르다’는 말이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 된다는 말이라고 했건만… 그건 주식 얘기고, ‘이번엔 사람과의 관계니까 다르다’고 또 한 번 멍청하게 사고해 본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관계를 경계만 하게 되고 결국은 고립되게 될 테니까.


 사실 이 글의 시작은 최근 이제 막 관계가 시작되었고 그리 깊은 교류를 하지 않았음에도 쎄-한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몇 있어 '쎄이다 경보'를 발효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서부터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들먹이며 다시 한번 바보 같은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알고 보면 그중 한 명이라도 예상과 달리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물음표들이 결국은 느낌표로 끝나는 일들을 숱하게 겪었음에도 세상에는 100%라는 게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믿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다시, 줄리언 반스의 앞 문장 둘만 가져와본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의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상처를 피할 도리는 없는 법이다. 물론 그게 싫어 극단적인 고립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최후의 보루로 밀어 두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 (네, 다음에 읽을 책은 월든입니다)


 나는 아둔한 존재에 불과하니까 또 한 번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직진해 보겠다 마음을 먹어본다. 정말 이상한 마무리이지만 난데없이 성경 말씀과 류시화 시인의 책 제목까지 끌어들여와 보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겠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PS_맙소사, 영화로도 봤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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