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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 some Mar 02. 2023

사람이 답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다양한 답들이 있는 법

결국 사람이 답이다.


문득 이런 문장 하나가 떠올라서 글을 시작해 본다. 사람이 답이다 라니, 어디선가 들어 본 문장인 것도 같은데 검색을 해봐도 딱히 무언가가 눈에 띄지는 않는다. 가끔은 뭔가 툭 떨어지는 것처럼 (부디 새똥만은 아니길) 불현듯 머릿속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지 않던가. 그냥 그런 거라고 하자.






오답


 문제는 사람정답만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실은 알고 보면 오답이 더 많다. 그 오답은 단지 정답이 아닐 뿐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치명적으로 잘못된 거대한 오답이기도 하다. 정답에 거의 가까웠지만 차마 동그라미를 쳐줄 수는 없어서 세모를 주고 마는 오답이 아니라, 시험지를 갈갈이 찢어서 태워버려도 남아있는 검댕에 분이 풀리지 않는 그런 오답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까지 분노를 마음껏 터트릴 수 있는 활화산 같은 사람이 (다행히도)되지 못한다. 굳이 말하자면 죽 그어진 빨간 엑스표에 두고두고 마음 아파하는 편이랄까. (아니 그런데 선생님들은 왜 그리 잔인하게 빨간펜으로 채점해야 했던 걸까)


 몇 번의 겨울 전에는 운이 그리 좋지 못했는지 오답인 사람들을 여럿 만났었는데 (아주 큰 엑스표였다) 그 일로 한동안 사람 만나는 일을 피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집에 있는 날이라고는 일 년을 통틀어도 한 손에 꼽을까 말까 하던 나였지만 회사를 오가는 일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고, 그렇다고 집에서 무언가 보람찬 일을 혼자 해내는 것도 아니라 그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일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과 잠 사이에 잠깐씩 깨어날 때면 그 답을 선택한 일을 번복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때 그 답을 고르지 않았더라면, 그 문제를 그냥 건너뛰었더라면, 아니 애초에 그 과목을 고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같은 0점짜리 시험지를 받아 들고도 아이들의 반응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그게 그냥 종잇장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며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릴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펑펑 눈물을 쏟을 만큼 슬픈 일일 수도 있다. 분명 그중 하나는 형편없는 점수의 시험지를 들고 친구들을 웃기려 들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험지를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꽁꽁 숨기고 애써 포. 커. 페. 이. 스. 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언제나 그 마지막 유형의 아이였는데, 물론 한 번도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어떻게든 감추려고 애쓰는 유형의 사람이다. (답의 종류 중에는 답답도 있는 걸)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부끄러워서일 수도 있고, 유난히 걱정이 많아서 일 수도 있고, 갖다 붙일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내가 답을 잘못 골랐다는 사실이나 그래서 형편없는 점수를 받고 말았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게 언제나의 마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마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처방이라곤 내 방 이불속의 작고 어두운 우주로 침잠하는 일뿐.






정답


 세상에 오답만 있는 건 아니고 당연히 정답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느 쪽이 더 많다고 시원하게 대답은 못하겠다. 정답을 더 많이 만나게 된다고 우등생이 되거나 오답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고 낙오자가 되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던가. 다른 건 몰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수치화해서, 그것도 정수로 떨어지는 값으로 매기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싶을 정도이다. 세상에는 정답에 거의 가까웠지만 굳이 따지자면 오답이라거나, 살짝 아쉽지만 이만하면 정답 같은 아리송한 것들이 더 많으니까. 그래도 아주 가끔씩 정답을 만나면 눈이 번쩍 뜨이곤 하는 걸 보면 적어도 나의 세상에서는 희귀한 존재인 것이 틀림없다.


 잊어버리기 전에 몇 문장만 써둬야지 했는데 또 이렇게 한참을 써 내려가고 있다. 가끔씩 긴 글을 쓰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이번엔 어제의 식사에서 시작이 되었다. 한동안 나의 컨디션과 비례하는 집의 청결도는 당연하게도 대체로 낮음을 유지해오고 있었는데 최근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온다길래 대청소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 깔끔하게 정돈된 김에 동네의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언제 한번 봐요, 로는 기약이 없을 것 같아서 만나기 좋은 핑곗거리를 건네보았던 것.


 그런데 집이 깨끗할 때 사람을 불러야겠다, 까지만 생각하고 점심시간에 불러놓고 뭘 먹는다..? 까지는 생각을 못했다가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떠올리니 뭐 이것저것 구성이 될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음식은 완전히 망했다. 다 때려치우고 요리를 배워서 직업으로 삼아볼까 했을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집에 음식냄새 남는 게 싫다고 안 해버릇하다 보니 결과물이 결코 내 맘 같지 않았다. 김혜리 기자의 말마따나,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리하지 않다 보니 혼자만의 식사도 거칠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문의 글을 쓰지 않다 보면 어느 새벽, 당신은 읽는 이가 기다린대도 긴 글을 쓸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리하지 않다 보면 혼자만의 식사도 거칠어진다. 당신의 우주는 그런 식으로 비좁아져 간다.
Twitter @Haery KIM


 그렇게 비좁아진 나의 우주에 누군가가 찾아와 주는 일은 조금 부끄럽고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분명 따뜻하고 조금은 소란스러운 무드를 만들어냈다. 착하디 착한 이 친구들은 탄 마늘과 새우도 맛있게 먹어주었고 싱거운 토마토소스는 원래 그런 브랜드라서 그렇다고 해주기도 했다. 낯선 사람들을 초대한 집들이 자리라면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겠지만 어째서인지 이 손님들에게는 나의 모자란 구석을 보이는 일이 영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청소하려고 세제를 뿌려놓기만 하고 문질러 닦지 않은 세면대나 이것저것 쑤셔 넣은 채로 활짝 열어놓은 욕실 거울장이 뒤늦게 눈에 띄긴 했지만)


 집이 깔끔하게 치워진 김에 사람들을 초대했다고 해도 어딘가 구멍이 있을 것 같아 조마조마했던 마음이지만 어쩌면 음식이 완벽하지 못했던 덕분에 조금 허술해질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성공적이지 못한 맛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양 두서없이 이런 얘기들을 점심부터 저녁때까지 참 길게도 주고받은 하루였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평소라면 굳이 하고 싶지 않아 했을 주제들의 이야기도 입에 올리게 되었는데 아마 무덤덤하게 넘기는 척했어도 다 티가 났을 것이다.


 시끌벅적했던 시간이 지나고 조용해진 집을 정리하는 동안, 머릿속의 어느 부분도 함께 정돈되고 깔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무심코 떠들어댄 잡담들이라고 생각했던 그 말과 말 사이에서 무언가 다녀간 느낌이었달까. 그런 기분이 든 이유에 대해 되짚어 보자면, 일부는 나의 이야기에 대한 상대의 리액션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그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차차 스스로의 생각이 정리되어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100퍼센트의 오답 같은 사람을 만난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났을 때, 힘들었겠다는 짧은 위로를 들었다. 그동안 빨갛게 주욱 그어진 채로 있던 엑스포의 네 꼭지를 가지런히 이어서 편수처럼 빚어준 느낌이었달까. 그러고 보니 그동안 이 얘기를 치듯 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누구도 게 힘들었겠다라고 해준 적은 없었다. 거꾸로 말해보자면 나는 그동안 그런 말이 들고 싶었었나 보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마침 그때 던져졌었나 보다. 신기한 건, 긴 위로의 말도 아니었고 짧은 공감의 탄사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결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사람의 말이란 이렇게 신비한 힘이 있다.


 하나 더. 최근 회사 생활에서 나는 어쩌면 내가 오답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아직 내가 고민을 명확히 결론짓지 못한 채 얘기하다 보니 이 친구들도 이렇다 할 리액션을 해준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그릇들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동안 내 머릿속의 찜찜함도 함께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문제들은 사실 알고 보면 최근 몇 주 동안, 어쩌면 지난 몇 년 동안 내내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주제이기도 했다. 그것을 바깥으로 꺼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발화하는 순간 문제가 좀 더 명확하게 정의되었고, 나 스스로도 그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답을 발견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울 즈음에는 '아아아 바보야 문제는 그게 아니라 저거였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내게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새 살을 돋게 만들어주는 것도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나 보다. 사람이 어렵지만 또 사람에서 답을 찾게 되는 게 이번 생의 과업인 걸까. 정해진 주제 없이 분야를 넘나들며 떠들었던 대화에서 나 혼자 이렇게 여러 교훈들을 줍고 있다는 걸 알면 그들이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어제 공유한 시간을 통해서 내 안의 무언가가 변화했다는 것이고 (아주 작은 움직임일 수도 있지만) 조언받은 것처럼 나는 그 사실을 조금은 긴 글로 기록해 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비좁아진 나의 우주를 조금씩 다시 넓혀볼 요량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람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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