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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Sep 22. 2018

혼자 걷는 비렁길 (상)

금오도 비렁길

 금오도 사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러지 않아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자 걷고 싶다는 생각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리던 참이었다. 같이 갈 사람을 찾았으나 다들 선약이 있다고 한다. 수요일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든든히 먹고는 길에서 먹을 과일과 오이를 챙겨 길을 나섰다.


 백야도 가는 2차선 도로의 4차선 확장공사가 거의 끝난 듯 막힘이 없어서 20분이 채 걸리지 않아 선착장에 도착했다.

 - 오랜만에 오셨네요, 오늘은 혼자 가세요?

 매표구 아가씨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자주 가는 통에 얼굴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가씨뿐이 아니었다. 승선할 때 표를 받는 아저씨도, 오늘은 혼자 가시네요, 하며 인사를 건넸다.


 승객이라고는 모두 4명으로 차 두 대가 실려 있었다. 선장 한 명, 선원 두 명과 함께 모두 일곱 명을 태우고 정확히 7시 25분에 출발했다. 고철에 가까운 배였다. 곳곳에 녹슨 부분을 숨기고 있던 하얀 페인트가 녹과 함께 떨어져 흉측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주말이면 서너 대의 대형버스와 함께 백 명이 넘는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배였다.


 1년 전 이맘때 이 배에서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며 금오도로 갔던 기억이 났다. 그때처럼 배는 하얀 물결을 뒤에 떨어뜨리며 동남쪽 금오도를 향해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미끄러져 갔다. 구름이 잔뜩 덮인 하늘은 걷기에는 그만이었다.


 비렁길 1코스를 시작한 시간은 8시 10분경이었다. 동행이 없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발걸음에 속도를 더해 2시간 코스인 5킬로를 최대한 단축하고 싶었다. 몇 번을 걸어도 금오도 비렁길만 한 경치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왼편의 산자락과 오른쪽의 벼랑 아래 바다를 끼고 난 오솔길은 아름다웠다.


 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앞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작은 배낭을 진 것은 여자였고 홀몸인 채로 걷는 남자가 낯선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배에서 못 보았던 이들은 근처에서 민박하고 아침에 길을 나섰을 것이다. 그들을 추월하고 얼마를 갔을까. 전망대에 네댓 명의 여인들이 막걸리를 컵에 따르고 있었다. 지나치면서 곁눈질을 하니, 두 명은 60대 후반으로 나머지는 50 전후로 보였다.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즐기면서 삽시다. 자, 위하여!

 그녀들이 말하는 소리를 등 뒤에서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침부터 막걸리를 마시는 여인들이 낯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이상했다.


 비렁길이 지나는 산등성이에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고 파전과 막걸리를 파는 곳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몇 번 이용했던 곳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컨테이너는 없어졌고 평상과 의자도 보이지 않았다. 없어진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지날 때마다 목을 축이고 빈 생수병을 채워갔던 약수터에 물이 흐르지 않았다. 약수가 분수처럼 솟던 거북 모양의 돌조각에는 물이 안 보였다. 지난 4월에 걸었을 때 지천으로 흐드러졌던 빨간 동백 꽃잎도 없었다. 대신 동백나무에는 그때 떨어지지 않았던 꽃들이 짙은 갈색의 열매로 바꿔 달고 있었다.


 1코스 끝 우거진 갈대 사이를 빠져나올 때는 걷기 시작한 지 1시간 40분 후였다. 중간중간 경치를 감상하고 사진을 찍느라 걸음을 늦추었기 때문이었다. 두포라는 작은 포구였다. 느티나무집이라는 가게 한쪽에 무언가 일하는 아낙이 보였다. 그 가게 주인인 일흔두 살의 할머니가 어떤 연하남과 바람이 났다고 들었는데 그 할머니인가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많든 적든 사람 사는 곳의 이야기가 아닌가.


 쉼 없이 2코스로 들어섰다.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제법 시원하게 불던 바람도 잔잔해졌다. 땀이 흘러 안경에 떨어지니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모자를 벗어 배낭에 넣고 수건으로 이마를 동여맸다. 오른발 네 번째 발가락에서 통증이 전해졌다.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신경이 쓰였다. 맞아, 지난번 걸을 때도 발가락이 아팠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구나, 아이고 멍청한 놈아! 신발 때문인가, 그때도 이 등산화를 신었던가. 참는 수밖에.


 박 선생에게는 4코스 중간에서 빠져 직접 집으로 가겠다고 해두었으니 엄살을 필 수도 없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가락을 살폈으나 아픈 까닭을 찾을 수 없었다. 땀도 식힐 겸 가져온 오이와 당근, 거봉을 먹고는 다시 신발 끈을 조였다. 한 시간 반이 걸리는 3.5킬로의 2코스를 한 시간 10분에 끝내고 바로 3코스로 들어섰다.


 비렁길 다섯 개 코스 중에서 가장 힘든 코스이나 가장 아름답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코스였다. 가파른 언덕길에서 숨이 턱에 받혔다. 지난여름 운동을 게을리해서 그런가. 한라산을 올라도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었는데 왜 이렇게 고되지. 돌멩이 투성이 길을 걸을 때는 발가락 통증이 더해졌고, 바람도 없는 땡볕을 걸을 때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느라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걸은 지 4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3코스 정상에 거의 왔을 무렵 반대편에서 오는 커플을 만났다. 쉰 살이 못 돼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 1코스부터 걸으셨어요?

 - 네.

 - 몇 시에 출발하셨죠?

 - 8시 10분 약간 지났을 거예요.

 - 와, 굉장히 빨리 오셨네요.


 정상의 전망대에서 쉬며 가져온 오이를 먹었다. 해를 가릴 수 없는 땡볕이었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3코스가 끝나는 곳에 있는 학동에서 마실 막걸리를 생각했다. 감칠맛이 도는 ‘개도 막걸리’를 파는 곳이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몇 사람이 반대쪽에서 올라왔다.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와 두 여인의 발개진 얼굴이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곳을 양보하고 일어섰다.


▼ 맞은편에서 오는 어선은 밤새 작업하고 귀환하는 것 같다. 만선일까?


▼ 멀리 돌산도와 화태도를 잇는 화태대교가 보인다. 비라도 내리려는 듯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 보이는 등대는 백야도 등대다.


▼ 흰색 페이트가 녹과 함께 떨어져 나간 모습이 여기저기 보인다. 좌측 멀리 평평한 능선이 금오도다.


▼ 멀리 내가 사는 아파트가 보인다.


▼ 주변의 다른 섬으로 승객을 나르는 여객선이다.


▼ 하얀 물결을 뒤에 남기고 배는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진다.


▼ 바다가 잔잔한 이유는 이처럼 섬으로 둘러 쌓였기 때문이다.


▼ 앞에 보이는 동네가 배의 목적지인 금오도 함구미다.


▼ 비렁길 1코스의 미역널방. 옛날 미역을 말렸던 곳이라고 한다.


▼ 비렁길의 아름다운 풍광


▼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곳이 고흥반도의 끝으로 한국의 우주기지가 있는 나로도이다.

▼ 보이는 마을이 1코스 끝 지점인 두포다.

▼ 갈대 사이로 난 좁은 길이 아름답다. 청춘남녀가 이곳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영화로 만들면 멋질 것 같다.

▼ 2코스 중간에서 만난 경치

▼ 멀리 2코스의 종점 마을인 직포가 보인다.

▼ 남자의 성기 모습을 닮은 촛대바위다. 옛날 여인들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전설이 있단다.

▼ 2코스 종점 직포가 점점 가까워진다.

▼ 3코스에서 본 풍광

▼ 4시간 가까이 걸어 도착한 3코스 정상 매봉 전망대

▼ 매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경치

▼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이들에게 전망대를 양보하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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