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매불망 기다리면 오지 않더니
시간표 대로 잘 살아온 나였다. 재수 없이 대학교에 입학했고, 너무 늦지 않게 졸업했다. 쉽지 않았지만 취업을 했고 30대가 되던 해에 결혼을 했다. 모든 과정이 완벽했다고 할 수 없지만, 남들이 하는 만큼 따라가면서 살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35살이 된 내 인생에 이제 남은 숙제는 뭘까. 앞으로의 인생이 막막하고 걱정됐지만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중간은 갈 수 있을터였다. 특별하고 거창한 인생 계획은 없었지만, 늦기 전에 아이를 낳고 잘 키워서 시집장가를 보내고 때가 되면 손자손녀를 보는 인생이라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했다.
스스로를 임신 준비생이라 불렀다. 대입, 취업같은 인생의 다음 단계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하고 구직을 하던 때처럼 내가 해야할 일을 하나 둘 실행해 나갔다. 먼저 난임병원에 다니며 나의 난자가 일하는 스케줄을 확인하고 일명 숙제(임신 가능성이 높은 날짜에 관계를 맺는 것)를 했다. 임신에 용하다는 시골 한약방에 찾아가 한약도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달에 딱 한 번만 찾아오는 임신테스트 기회에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수십 번. 마음이 급한 이유는 단 하나, 내 나이는 노산으로 향하며 남들보다 늦어진다는 것이었다.
실패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남들만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아이를 강요하는 부모님들도 없었다. 내가 하고자 마음 먹은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자 나 스스로 '잘 안되는 사람'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이상 신호를 느낀 건 여름휴가로 떠난 괌에서였다. 가족여행으로 어린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는 한국인 가족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으로 함께할 가족을 꾸리고 싶은 마음보다 앞선 것은 그저 남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생겨도 결국 남들처럼 키울 생각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이 임신준비생임을 잊고 지내기로 했다. 임신을 위해 노력하는 대신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이 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 무엇도 준비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의 나 자신을 챙기기로 했다. 늘 적당한 강도의 운동만 찾아다니다가 처음으로 PT를 받으며 해보지 않았던 힘쓰는 운동을 시작했다. 미뤄두었던 종합건강검진을 받으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MRI, CT(임산부는 절대 금지)도 찍고 위내시경도 했다. 어쩐지 무기력한 내 상태가 정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 내어 정신의학과 진료도 받았다. 선생님 앞에서 눈물 콧물을 빼며 상담을 받고는 우울증 약을 처방받았다. 임신을 하면 절대 먹으면 안 되는 약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임신을 했을 리가 없으니 괜찮다고 단언하며 약을 복용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임신이었다.
생리를 할 때가 되었는지 어쩐 일인지 소식이 전혀 없었다. 한 번도 아픈 적 없던 엉덩이 뼈가 갑자기 아팠다. 살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계속 우울증 약을 먹기에는 조금 마음이 불안했다. 설마 하며 집에 한가득 쌓여있던 임신테스트기로 테스트를 하자마자 처음 보는 빨간 두 줄이 보였다. 잘 보이지 않는 시약선을 보기 위해 매직 아이용 눈을 할 필요도 없었다. 대조선 만큼 진한 색의 붉은 두 줄이었다.
엉엉 울었다. 나 자신을 챙기다 보니 아직 누군가를 키울 준비가 안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참이기 때문이다. 내 성격이겠거니 했던 무기력함은 알고 보니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이었다. 뻐근하다 싶었던 목과 허리도 디스크를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에게 미안했다. 내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나이가 찼으니 임신을 해야 한다는 세상의 규칙에 휩쓸렸다는 사실이 한심스러웠다.
그토록 기다릴 때는 오지 않더니. 내 인생의 다음 과제는 임신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맘처럼 되지 않더니. 아이는 본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엄마보다는 자기 인생을 챙기는 엄마가 더 좋았던가보다. 남들처럼 살기에 급급한 엄마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채워나가고자 하는 엄마가 더 좋았던가보다. 아이가 찾아 온 순간의 나를 기억해야 한다. 아이가 생긴 순간부터 나와 함께하는 모든 날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