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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Oct 12. 2016

사폭 바지 단디 동여 매고 런던에 도착했다

런던 여행 2 - '다른 것'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사폭 바지 입고 영국 간다 하니 다들 그것이 뭐냐고 묻는다. 사폭 바지는 사폭 (네 쪽의 천), 즉 큰 사폭과 작은 사폭, 마루폭, 허리, 일명 '까마귀머리'로 불리는 허리춤 접히는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한국의 남자 바지를 말하는데 비슷한 유형이 바로 배기팬츠다. 한국적인 멋이라면 허리춤을 이리저리 휙 휙 말아 접어서 입기에 정말 고무줄처럼 누구에게나 맞는다는 점? 


바깥 활동을 하지 않았던 조선 여인들이 바지를 입었을 리 만무하기에 여인네가 탐하는 남정네의 사폭 바지를 여행용으로 한 번 입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이 바지 한눈에 봐도 출토 유물인 해평 윤씨의 사폭 바지보다 훨씬 현대적이며 가죽 재킷과 매치하면 서늘한 런던 날씨에도 어울릴 것 같다. 한복을 만들다 보니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옷을 싸는 순간부터 여행이 훨씬 더 색다르게 시작됨을 느끼니 고마운 한복과의 인연이다.



여행지에서 쓰는 색감을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미적 더듬이를 한껏 곤두세우며 비행기에서 바로 밑의 영국 땅을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세계의 중심을 자처했던 곳, 영국은 저렇게 잘 구획된 도시의 형상으로 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영국 하면 무엇을 떠올릴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하수도'다. 강의 교재를 준비하던 중 영국의 의학전문지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 (BMJ)>가 '지난 160여 년 동안 의학 분야의 가자 위대한 성과가 무엇이나?'는 인터넷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었다. 네티즌들은 인간의 삶을 혁신적으로 개선시킨 항생제와 마취제 그리고 백신 대신에 놀랍게도 '하수도'를 일등으로 선정하였다. 좀 지난 일이다. 중앙일보가 2007년 1월 20일에 낸 정말 빛바랜 기사를 오려내 지금까지 간직했었다, 언젠가 영국의 하수도를 직접 보려고 말이다. A4 용지 반 장 정도의 기사가 지닌 위력이 대단함을 몸소 실감하는 순간이다.



수도와 상수도를 구분한 것이 1868년이니 그전까지 물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였을지 짐작이 간다. 태양왕 루이 14세를 비롯하여 유럽의 왕과 귀족들이 여름궁전을 따로 두어 주거지를 자주 옮긴 데에는 씻지 않아 몸에 서식하는 벼룩과 이를 떨쳐 내고, 온갖 악취와 그것을 상쇄하기 위한 강한 향수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로 몸을 씻지 않는 문화... 물에 온갖 병균이 득실대기 때문에 물을 멀리해야 한다는 믿음은 정확한 진단이었다! 19세기 중후반까지 대부분의 병이 수인성이었다는 진실을 내게 폭로해 준 것은 <화장실의 작은 역사 - 요강과 뒷간>이라는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나의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오물로 가득 찬 유럽의 지형도를 그리게 했던 책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 안에 나오는 <바캉스>편도 중세로의 시간여행과 그 당시의 위생상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착하는 순간 코를 찌르는 악취와 오물에 질식할 것 같다던 주인공이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곳, 런던! 조금 있으면 그 곳에 도착한다.


근대의 시작이 비록 철학과 예술, 문학과 정치 각 분야에서 조금씩 시기와 성격을 달리하지만 굳이 철학적으로 따져본다면 데카르트의 유명한 cogito ergosum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보다 엄밀하게는 '본다'는 의미다.) 세상의 모든 것을 회의하고 이성적으로 비판해봐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발상이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상에 바탕을 둔 이성중심주의와 과학 물신주의는 조직하고, 체계를 세우고, 가시화할 수 없는 것을 가시화하는 방향으로 인류 근대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영국이 있다. 임철규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은 이런 서양의 근대를 잘 요약해 놓은 책으로 나를 흥분하게 했었다. 런던에 도착하기도 전에 온갖 책들이 밀물처럼 떠오르는 것을 보니 정말 나는 여행을 앞두고 있구나....


런던의 하수구 멘홀 뚜겅!

이 잘 구획된, 어딜 가나 인간 내비게이션이라는 별명의 나도 헷갈리게 만드는 이 통일성. 이 잘 조직된 이성적인 도시계획, 건물 배치를 보니 과연 내가 런던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확 밀려온다.


전 세계에서 가장 CCTV가 많은 나라가 바로 영국이다. 조지 오웰의 책 때문인지 눈여겨보니 정말 살벌하게 도처에 수십 개의 감시 카메라가 포진해 있으며 사방에 친절한 경고 문구가 나를 반긴다. 그래서 그런가 아니면 영국인의 유머 때문인지 태생적 친절함을 장착한 듯 사람들은 몹시 당황스럽게 아주 몸에 밴 친절을 보여주었으며 정말 안전하게 여행 내내 그 친절함을 받았다.



여행하며 우리는 온갖 것을 수집한다. 디지털 노매드 민족의 대이동은 각종 신기하고 '멋진' 것들과 '내가 거기 있었음'을 매체를 통해 분사한다. 하지만 현지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작고 일상적인 디테일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저 톤 다운된 초록색 뚜껑, 저 둥글둥글한 전체 형태, 색깔별로 분리수거하라는 스티커! 물론 분리수거함 앞에 나뒹구는 하얀 비닐봉지도 인간적이어서 좋을 뿐만 아니라 낯선 나라에서 낯선 글자를 보는 것도 무척이나 신나는 일이다. 여행지에서 낯선 글을 읽는 것만큼 여행의 묘미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없다. 물론 알파벳이어서 태국어나 아랍어보다 훨씬 친근하지만 왠지 낯선 저 이름들, 웨스트민스터 시라니! 이 나라에서 경고하는 방법 "Warning" 조차도 반듯한 서체가 맘에 든다. 노란 경고판을 부착하는 방법까지... 신기하고 재미있다.



브링크만과 제발트가 오른쪽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횡단보도를 걷다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했을지... 각종 통계와 기상천외한 실험으로 유명한 영국이니 그 통계도 있을 법 하지만 그래도 오죽하면 이런 문구까지 횡단보도에 적혀 있으랴 싶다. 사실 독일의 팝 문학 작가였던 롤프 디터 브링크만도 런던 펍에서 술 마시고 나오다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을 보는 바람에 요절했다. 오래 살았더라면 청춘의 반항기로 독기를 품었던 브링크만도 귄터 그라스만큼 유명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왼쪽을 보는 바람에 독문학자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현대 작가인 제발트도 왼쪽을 보다가 그만 생을 달리했으니 저 무심한 하얀 점선 안의 하얀 9 철자는 이 세상의 끝자락에 놓인 마지막 문구인 셈이다.



오래된 런던의 지하철 역사에선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연한 노란색으로 역내를 밝히는 등과 그 빛을 뚫고 들어오고 나가는 조그마한 전동차는 시간을 초월한 묵직한 세월의 무게와 현대의 속도를 잘 맞추고 있었다. 이 이국적인 지하철 역 안에 흐르는 눅눅한 공기와 조그맣고 날렵한 통로와 오래된 벽 장식은 이상하게 한 박자 쉬어가고픈 마음이 들게 했다. 물론 이대 역 에스칼레이터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라가는 저 에스칼레이터에 올라서는 순간 이런 여행자의 공상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이 곳 지하철은 시간에 따라 무정차 역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런 당혹스러운 경우를 알고 나니 방송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갑자기 내리려는 역을 그냥 통과하면 얼마나 난감할까 싶어 편안하지가 않다. 지금 내가 닮은 듯 낯선 도시를 여행하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런던은 감각적인 디테일로 무방비 상태의 나를 문득문득 감동시켰다. 런던이 비록 지금 도심부를 완전히 리노베이션 하는 공사로 주요 역 밖은 죄다 이런 공사 가림막이 처져 있고 그 앞에 몇 겹의 안전장치로 어수선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건물 공사를 위해 쳐 놓은 이 안전 지지대가 이리저리 삼겹 사 겹으로 뒤엉켜있는 모양이 낯설지만 왠지 더 안전할 것 같고, 왠지 그 엮은 모양마저 색달라서 나름 조형예술 같아 보였다. 낯선 여행지에서 첫날이 아닌가! 내 집 떠나 내 생애 처음 여행하는 사람처럼 내 마음은 설렜고 모든 것에 긍정적인 해석을 씌워줄 마음이 되어 있었다.



현지인과 관광객들을 구분할 수 없는 가운데 참 다양한 민족, 인종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옷차림이 내 눈을 휙 휙 돌리게 만든다. 내 사폭 바지와 가죽 재킷은 저말 다양한 히잡과 히잡의 색과 인도인의 사리에 비하면 전혀 전통의상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한복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내가 만든 다양한 한복이 수십 벌 있지만 치마와 저고리 구성이 아닌 다른 한복 차림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나 우리네 조상은 현대적이었는지 나의 사폭 바지는 영락없는 배기팬츠였다. 그것도 상당히 아방가르드해 보이기까지 한!


원래 여행 첫날은 탐색전이지만 저 앞에 내셔널 갤러리가 보인다. 긴 발품 여정의 끝에 내셔널 갤러리라니... 발 닫는 곳마다 미적 향연이다!



글, 사진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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