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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Oct 21. 2016

지적 보험

런던 여행 6 - 테이트 브리튼에서 BP논쟁을 생각하며

테이트 브리튼 Tate Britain이라는 미술관에 들린 이유는 숙소가 이곳 첼시 지역이었고, 템즈 강이 걸어서 산책 갈 만큼 지척인 데다 언젠가 본 삽화 한 점이 우연히 생각났고, 이미 몇 해전에 '테이트 논란'으로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은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하수구를 만들어내기 전 템즈강은 포세이돈이 강물에 빠진 삼지창을 못 꺼낼 정도로 오염되었다는 내용의 삽화에다 2010년에는 석유 회사 BP의 테이트 후원을 끊어야 한다며 영국 예술가 171명이 공동선언을 발표하기도 했으니 과연 그 '테이트 논란'의 진원지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었다. 우연과 연상, 회상과 호기심이 엉키고 풀리며 이 날의 산책 코스에 테이트 브리튼과 템즈 강이 들어왔는데 더욱이 이곳은 영국의 국민 화가인 터너가 기증한 진귀한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고 나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바보같이 터너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이 곳은 관광객보다는 지역 주민이 더 많이 찾는지 복작거리지도 않고 소란스럽지도 않으며 단체 관광객도 대로에 관광버스도 안 보였다. 촉이 온다! 누구나 원하는 인사이드 여행 팁이 우연히 얻어걸린 것 같은 느낌이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설치 미술이 전시 중이었고 마치 하늘에서 죽 죽 떨어지는 무지개 색 빗방울 같은 느낌으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독일의 대표 문호는 괴테와 쉴러, 영국의 대표 작가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리고 대표 화가는 윌리엄 터너라고 한다. 두 명의 윌리엄에 지금의 영국 왕자까지 윌리엄의 나라에서 오늘은 화가인 윌리엄을 집중적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영국의 자연과 풍광을 평생 즐겨 그렸고 그를 위해 테이트 브리튼의 11개의 전시실에서는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윌리엄 터너'는 언젠가 해전에 관한 자료를 읽다가 알게 된 사람이다. 사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정보는 "그의 해전 장면은 생생한 파도 표현이 장관이다" 정도였지만 그렇게 생생하다던 그의 붓터치가 몹시도 궁금했었다.


해전이라고 하니 기억의 각색과 현재의 경험, 과거의 추억이 엉키며 대서양의 물결이 어느 정도로 거센지가 문득 떠올랐다. 스페인 남부에 있는 한적하고 조그만 섬 '라 고메라 La Gomera'에서 절벽 밑 해안가에 돌을 쌓아 만든 '바다 수영장'을  본 적이 있었다. 파도가 거센 날  바다 수영장 돌 둑을 때리는 거센 파도는 바라보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삣 서고 온몸이 떨릴정도로 사나웠다. 실제로 보니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영국에서 바다의 위용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 그린 것이 맞다. 그의 붓터치가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얼굴을 강타할 듯 강렬다.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에서 잔인한 식육 장면만 빠진 것 같았다.



다음 방에서 만난 윌리엄 터너가 스케치를 즐겨하였다는 것과 스위스를 참 좋아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렸다는 것은 정말 예상하지 않았던 거였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이 그림 앞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이 연한 물색의 수채화를 보니 홑겹 한복 치마연상되었다. 한복의 치마가 원래부터 겹치마는 아니었다. 서양 옷의 안감이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겹으로 안감을 대는 치마를 입게 되었는데 그 전에는 이런 색감의 홑치마를 몇 겹으로 겹쳐 입었다고 한다. 나도 옥사로 홑겹 치마를 만든 적이 있는데 속치마를 몇 겹이나 겹겹으로, 무지기 치마까지 갖춰 입고 그 위에 홑겹 치마를 걸친 느낌이 이 수채화와 닮았다.



여기 관람객들을 보니 복작복작한 다른 미술관에서와는 달리 이곳이 제 집 안방인양 편안해하는 것 같다. 지역 미술관에서 앞으로 살아가며 쓸 지적 자산을 쌓아가는 모습이 마치 보험을 들어놓은 듯 만족스러워 보인다. 이곳은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인 듯 관람하는 관람객도, 바닥에서 그림 그리는 꼬마도, 의자에 대자로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도, 스케치에 몰두하는 할아버지도 모두 편안하고 내 집인양 자연스럽다. 한국처럼 노년에 걱정 없이 이동할 수 있는 이동의 자유 (노인의 지하철 무료 이용)를 주는 것이 더 좋을까.. 아니면 영국처럼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 더 좋을까? 한국의 미술관에 입장료가 비싸서 그곳에 노령 인구가 적은 것이 아닐 것이다. 이 나라의 노인들이 노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지적인 보험을 들어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지 절감한다.



간이 의자를 펼쳐 놓고 열심히 스케치에 몰두 중인 할아버지 한 분을 뒷전에서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요즘 노년의 삶을 미리 간접 체험하고 있어서 그런지 어떻게 생업전선에서 벗어난 노년의 삶을 꾸려가야 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사실 무형의 보험에는 친구 보험도 있고 지적 보험도 있고 좋은 성격 보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모두 모아서 서 인생 보험이라는 이름으로 가입해 놓고 싶다.


테이트 브리튼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전시 중이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도 보이고


잠시 작품 앞에 앉았다가 옆에 계신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여행하는 중이에요. 어쩌다 런던에서 미술관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입고 있는 옷이 사실은 사폭 바지예요. 전통복식인데... 저 그림은... 그렇죠? 아하! 이렇게 낯선 사람과 그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유쾌한 스몰 토크로 헤어지는 곳이 바로 런던의 동네 미술관을 찾는 맛이 아닌가 싶다. 오늘만큼은 나도 첼시 주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예술계가 담배회사의 후원을 받는 게 당연시됐지만 이제 그런 일은 사라졌다. 왜 기름회사엔 그런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가?” 작은 의문과 균열로 시작돼 세상의 상식이 뒤바뀌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세계 곳곳에서 기름 유출로 문제 많은 정유 회사 BP의 후원을 받지 말라던 영국 예술과 171인의 선언 이후 테이트는 자신들의 윤리위원회가 스폰서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하고 있고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그들 또한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항의할 권리가 있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힘들어도 예술 후원은 공공펀드를 더 늘려가야 한다는 대안들도 제기됐다. ‘테이트 논란’은 영국 사회가 그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9189.html#csidxd4c4c0abc6619b3affed315a30fceea



글, 사진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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