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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Dec 22. 2016

바람과 불과 음악에 취한 에든버러

런던 위 에든버러 1 - 북쪽의 아테네를 만난 첫 날

시간이 채색한 올드 타운의 검은 사암 벽은 마치 요새처럼 도시 전체를 휘몰아 감고 있었다. 유럽 중세 도시들을 초토화시켰던 페스트라는 대재앙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향이 강한 각종 허브와 유황을 태워 사악한 악마와 마녀의 기운을 몰아내려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골목을 가득 채운 역한 오물 냄새와 씻지 않는 인간의 몸과 입에서 풍기는 지옥을 방불케 하는 악취, 그 와중에 부패한 사체의 냄새는 악취에 관대했던 중세인의 후각도 어느 정도 자극했을 것이다. 강한 향료의 매쾌한 연기, 벽을 타고 올라가던 검은 그을음! 갑옷과 투구, 창과 방패로 무장한 기사들과 성벽에 웅크리고 앉아 화살을 장전한 용병들, 두건을 깊게 눌러쓴 채 수도원에서 나오는 검은 옷의 수도사들... 런던에서 타고 온 기차의 종착역 에든버러 지하역에서 나온 나의 눈에 비친 에든버러는 그런 중세의 이미지를 저녁노을에 한 가득 투사하고 있었다.


장엄한 첫 인상, 에든버러 올드타운에 저녁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8월, 이 거대한 요새를 뒤 흔들고 있던 것은 대포와 총성이 아니라 잔잔히 흐르는 음악이었다. 한여름의 열기와 뜨거운 태양 빛을 받은 장미가 아니라, 눈에 덮이고 바람이 페부에 꽂히는 저 봉블랑 가는 도로 한 구석에 핀 알프스의 장미 같은 그런 황량하고 견고한 인상의 올드타운! 갑작스러운 열차 고장으로 우왕좌왕하며 에든버러 숙소 주인과 통화하던 그 시간, 자꾸 올드타운을 쳐다보며 뉴타운에 숙소를 잡았다는 것에 황당해하던 시간이 내가 유일하게 이 거친 동화 같은 곳에서 현재시간으로 되돌아 갔던 때였을 것이다. 물론 순간 순간 현재와 오버랩되는 여러 장면들이 머리를 스쳤지만 나의 상념들은 뾰족한 톱날을 들이대지 않고 무난하게 이 올드타운의 아름다운 정취와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첫 날이 아닌가!

강렬하고 단단한 요새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순례자의 계단을 밟으며 현재보다는 좀 더 과거로, 좀 더 멀리 있던 세계로 빨리 들어가고 싶은 조바심이 일었다. 나는 이제 이 계단을 올라가면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와의 지난한 역사가 점철된 역사의 장소로 들어간다. 그곳의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 그리고 이 두 성을 연결하던 스코틀랜드 왕가의 상징인 로열 마일에서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 펼쳐지고 있었다. 에든버러를 한여름에 잠깐 피어나게 하는 이 따뜻한 음악의 선율이 아픈 역사를 지닌 스코틀랜드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새로운 동화를 쓰고 있는 이 오래된 도시의 매력에 대한 기대는 한껏 상승하고 있었다.



로열 마일에서는 자신들의 공연을 알리려는 여러 공연단의 선전이 한창이었다. 공연 홍보와 호객 행위를 함께 해야 하는 프린지 페스티벌 참가자들의 노동이 녹녹한 작업은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과 춤사위는 아직도 추운 이 북쪽의 바람에 경직되어 있었고 그들이 선 작은 무대는 채 10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표심을 향한 치열한 땀의 각축장이었다. 미숙하지만 관객과 소통할 줄 아는 거리 아티스트들은 제각기 가지고 있는 작은 재능으로 불꽃을 만들고 농구공을 돌리고 바이올린을 켰다. 음악의 향연이 성대하고 장엄하게 울려 퍼질 것만 같은 이 고색창연한 돌바닥 길 위에는 관광객을 향한 공짜 표와 50% 할인 표와 1+1 표를 팔기 위한 노동이 박혀 있었다.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한국 공연단에 눈길이 갔던 것은 아름다운 한복이 늘 그렇듯이 나의 시선을 확 낚아채었기 때문이었고, 한국인의 눈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아름다운 춤사위와 짙은 화장이 어딘가 모르게 격이 다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비단으로 지은 한복에서는 은은한 광택이 고상하게 빛나고 틀어 올려 가지런하게 쪽 지은 머리와 그 위에 올린 족두리 그리고 그들 뒤에서 면류관을 쓴 왕과 화려한 활옷을 입고 대수머리를 한 왕비는 한눈에 봐도 화려했다. 한국의 왕실이 이렇게 대중 친화적이었나 싶을 정도로 어가 행렬은 인천공항 출국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이곳 에든버러 로열 마일에도 출몰했다. 영국 왕실도 스웨덴 왕실도, 네덜란드 왕실이나 일본의 왕실처럼 현재 존속하는 왕실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조선 왕가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그 이미지를 소진하고 있었고, 조선 황제국의 위엄은 무대 안에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만난 어가 행렬은 이미지로 소비되는 허상이었고 스코틀랜드의 현재처럼 자랑스러운 과거와 궁핍한 현재 사이에서 스산하게 흔들리는 바람소리였다.



전통복식에 대한 상념이 깊어지는 순간 마주한 스코틀랜드의 전통복식! 유난히 하얀색을 좋아했던 백의민족의 복식 뒤에는 아궁이 문화가 있고, 백의는 그 아궁이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잿물이 최상의 표백제였기 때문에 질기게 정착되었을 것이다. 스코틀랜의 거칠고 황량한 산하, 그곳에는 양들이 지천이었고, 질 좋은 양모는 스코틀랜드 복식의 최상의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전통복식을 대표하는 그 타탄체크와 한복은 전통의 맥락에서 잘 보존되어 있다. 보존과 일상화 사이에서 우리도 고민하고 저들도 고민하는 것 같다. 관혼상제에 남아있는 한때는 일상복이었던 한복의 존재, 지금은 거리로 경복궁으로 나온 한복이 마냥 반갑기만 하지만 아직도 일상복으로서의 한복은 요원하고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전통복식 또한 그래 보인다. 박제화된 과거, 박제화된 복식, 박제가 되어 눈을 부라리고 있는 거대한 악어라도 만난 것처럼 전통복식을 차려입은 남자를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타탄 체크 치마를 갖춰입고 전통 신발을 신은 스코틀랜드 남자
바로 이 이미지! 스코틀랜드라면 이 이미지여야했다. 그림책을 박차고 나온 그런!
일상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전통으로 잘 보존된 옷으로 축제때는 그들도 낯설어서 즐기는 옷.

아름다운 '북쪽의 아테네'는 지혜와 전투의 여신처럼 강하고 멋진 풍광으로 여행자의 이런저런 상념을 잠재우며 저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발걸음을 이끌고 있었다. 비록 돌바닥이 마치 거인이 한 대 걷어차는 듯 사정없이 발바닥을 쑤셔댔고 사방에서 돌리는 전단지는 힘겹게 손에 쌓여 갔지만 손에 쥔 맥주 한 켄만으로도 에든버러 올드타운의 정취를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이제는 길거리 예술가들이 입에서 한껏 뿜어내는 불꽃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 시간이다. 석양에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는 사암 벽은 그 자체로 영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그 풍광을 보며 여행자들은 007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하고 원탁의 기사로 유명한 아더왕의 전설을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칸톤 힐과 Arthur's Seat도 이런저런 전설과 동화와 무용담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려 보였고 내일의 여정을 이미 마음속에 다지게 했다. 노곤한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저기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노란빛과 붉은빛으로 흔들리는 이 도시의 정취 때문인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날인 첫날의 정취가 이만큼이면 됐다. 딱 이 정도의 감동과 이 정도의 상념과 이 정도의 피곤함을 가지고 내일의 마법을 위해 하루를 마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올드타운에 석양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불꽃 마술사

글, 사진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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