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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Jun 14. 2024

버거와 버거움에 대하여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별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딸은 아버지를 아들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사람들이 말했으니까. 아버지에게서 닮고 싶은 구석 같은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알코올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삶에서 본받고 싶은 점? 그런 게 있을 리가.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 정도의 난이도와 맞먹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삶의 여정 어디에선가 나이를 먹어가며 받아들이게 됐던 것 같다.

'아아, 젠장. 난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어쩌면 나는 아버지를 핑계 삼고 싶었던 것도 같다. 술로 인해 망가져버린 인생.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음에도, 나는 술을 좋아했다. 혼술을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를 만났고, 술을 끊지 못했던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기까지 했었다. 알코올중독 아버지는, 술을 못 끊는 멋진 이유가 되어 줬다. 아아, 아버지. 내게 중독 성향을 물려주신 내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중독 유전자 때문에 제가 술을 못 끊어요. 제가 술을 못 끊는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아버지 탓이죠. 아버지, 아아. 내 아버지.


이제와 돌아보면, 나는 아버지를 닮았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렇게나 술을 마시고도 암 같은 큰 병에는 걸리지 않았더랬다. 술 같은 건 마시지도 않던 내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열일곱, 어머니 나이 마흔일곱의 일. 나는 어머니의 투병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고, 멀쩡했던 사람이 항암과 수술 후 급격하게 시들어가던 그 6개월 남짓의 날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가 말했었다. 유방암은 높은 확률로 딸에게 유전된다고. 어쩌면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닮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를 닮았다고 믿으면서, 암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건지도. 






"암입니다."

70대 의사는 그 뒤로도 한참 무슨 말인가를 이어갔다. 당연하게도, 암이라는 단어 이후의 말들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 암이구나...'

수많은 영화와 책에서 나오는 장면. 암 선고를 받은 후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병원에 들어서기 전 나 역시 그런 장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있었더랬다. 내게 시나리오를 쓸 권리가 주어졌다면, 내가 원했던 장면은 이런 거였다. 

잔뜩 긴장한 내 앞에서 의사가 말한다. 

"혹입니다. 암 아니고요. 앞으로 추적관찰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나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웃으며 대답하는 거다. 

"어우, 진짜 긴장했어요. 목이 칼칼하기만 해도 암인가 해서... 지난 일주일이 정말 훌쩍훌쩍. 어우, 감사합니다."

이제라도 진짜 조심해야지 다짐하면서 건강에 좋은 음식을 찾아보는, 뭐 그런 식의 마무리로 이 병원 장면은 페이드 아웃. 그게 내가 간절히 꿈꾸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역시나. 내 인생 스토리는 내가 써나가는 게 아닌 듯했다. 기대와 달리 의사는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으로 "암입니다"하고 말을 시작했다. 이제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장면을. 암 선고를 받은 저 여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온 내가,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화면 속 나는, '그래... 그럴 만했지'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이라니요? 제가요? 왜 제가 그런 병에 걸린 거죠?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식의 격한 반응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꽤 차분한 인간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암이라는군' => '음, 그럴 만했지' 하는 식의 사고가 바로 이어져서, 스스로도 황당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참으로... 그럴 만하긴 했다. 암이든 뭐든, 그 어떤 이상이 생겨도 이상할 것 없는 지난 몇 년이었으니까. 모든 이유들이 너무나 존재감이 강해서, 단 하나의 이유를 꼽기 어려울 정도였다.


추정원인 1. 역시 스트레스가 문제였을까. 2019년 별거를 시작하고 2020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에 이혼 소송을 시작하고 2022년에 이혼소송이 끝이 났었다. 별거를 결정하기 전에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들. 그동안 나는 어땠더라.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울고 또 울고, 이놈의 인생 버거워 죽겠네 하며 도망치고 숨고, 그럼에도 아이의 생활을 지켜내려 아침이면 벌떡, 멀쩡한 척하다가 밤이 되면 또 혼자 무너지고 울고 일어서고 또 울부짖고.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 시간들이 너무 무거워 삶 자체에서 도망치고도 싶었다. 숱한 날을, 나는,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 하는 나를 붙잡는 기분으로 보냈다. 그러니.... 그래, 이런 일이 벌어질 만도 했다.


추정원인 2. 역시 술이 문제였을까. 1급 발암물질이라는 그 술을 나는 꾸준히 마셔댔다. 이렇게나 고생한 나를 위로해 줘야지, 홀로 짠짠. '하루의 마무리는 역시 맥주 한 잔이지' 외치며 보냈다. 설마.. 한 잔만 마셨을 리가 없었다. 한 잔은 금세 두 잔이 됐고 두 잔은 금세 세 잔이 됐고. 그렇게 비워대며 즐거워했더랬다. 그것이 나를 위하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리고 여린 내 마음이 이렇게나 상처받았으니, 이 정도 자기 위로쯤은 해줘야지. 맨 정신에 누워봤자 잠은 오지 않았다. 어머, 스트레스는 안 좋아. 차라리 술로 달래. 기분 좋게 마시고 푹 잠들어버려.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기만 해도, 몸은 웃는 줄 안다잖아? 자자, 마시고 웃어. 그러면 되는 거야. 그런 날들이 벌써 몇 년째 이어지고 있었으니. 그래, 충분히 병이 날만 한 것 같았다.


추정원인 3. 역시 잠과 밥이 부족했을까. 나는 지난 몇 년을, 마음 하나 달래 보려 잠과 밥을 줄인 채 지내왔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는 젊고, 마음의 병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느꼈고, 그렇다면 별 문제없는 몸은, 마음을 위해 좀 더 버텨내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밤마다 술을 마시니, 살이 쪘다. 그리고 나는 그 살을 빼기 위해 굶기를 택했다. 밤새 많이 먹었으니까 낮엔 굶어도 괜찮아. 숙취로 더부룩한 속이, 굶고 나면 차라리 편했다. 어우, 비만이 얼마나 위험하니, 배고파도 참아. 술을 해독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할 법도 했지만, 몸이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또 밤. 이런 낮을 보냈으니 밤이 오면 배가 고팠고, 그러면 또 술을 마셨다. 

충분한 수면? 잠까지 다 자고 어떻게 즐겁게 살아. 잠을 줄여야 내 하루가 길어지는 것 같았다. 하루 온종일 회사를 위해 일했고 집에 와선 엄마라는 이름을 위해 일을 했다.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집을 치우고. 자, 이 밤. 밤이 된 이제야 겨우 쉬고 있는데 벌써 자야 한다고? 안 자 안 자, 절대 안 잘 거야. 낮에 졸리면? 밥은 안 먹여도 커피는 챙겨 먹였다. 하루 3~4시간을 자며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고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니,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몸에 생긴 이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혼자 오신 거죠?"

멍하게 앉아 있는 내게, 의사가 물었다. 당연한 듯 "네-"하고 답했다. 누구를 데리고 올 수 있었을까. 돌아가신 부모님? 제 앞가림도 바쁜 오빠? 12살 아들? 혈육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봐도, 선뜻 '나 좀 보호해 주세요'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건, 내가 택한 삶의 자리이기도 했다. 부모님도 안 계신 입장에서 이혼을 한다는 건, 웬만한 일은 홀로 감당하기로 결심한 거였으니까.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 혼자 해낼 수 있을까. 수술 당일엔 간병인을 쓸 수 있을까. 며칠 후면 회복이 될까.


그리고 의사는 궁금한 게 없냐고 물어왔다.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의사의 가운 어딘가만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을 물어야 할까. 머릿속에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의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건 '검사결과가 잘못될 확률'에 대한 기대였다. 확률. 이렇게나 멀쩡하고 아무 증상도 없는데 암이라니? 당신이 믿고 있는 그 검사 결과가 잘못될 확률은 없는 건지가 정말 묻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 의사의 표정을 바라봤다.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 나 홀로 쓸데없이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음을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나는 암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는 거였다. 질문이라. 무엇을 물어야 할까. 

"수술하면 되는 거죠?"


암이라도 죽진 않죠? 수술할 수 있는 거죠? 앞으로 뭘 해야 하죠? 어디로 가야 하죠?

다음 단계가 뭐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아이는 어떡하죠? 회사일은 어떡하죠?

저는 정말 혼자인데, 이거 제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건가요?


머릿속에 떠오른 온갖 질문들. 그걸 한마디로 뭉뚱그려 뱉은 기분이었다. 수술하면 되는 거죠?

돌아보면 우습다. 수술하면? 되긴 뭐가 되? 

환자가 되겠지. 수술 전엔 암환자. 수술 이후엔 암 조직을 떼어낸 환자. 완치 판정을 받기 위해 수년간 관찰해야 하는 그런 환자가 되겠지. 어쩌면 나는 의사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뭐 어떻게 되는 건데?'





시작은 건강검진이었다. 별거와 이혼, 그리고 코로나까지 이어지는 상황 핑계를 대며 나는 '대쪽 같은' 굳센 태도로 건강검진을 미루고 있었다. 건강검진을 알아볼 에너지가 없었던 건지도. 아무튼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친구가 올해 들어 여러 번 같은 말을 했더랬다.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유전질환도 있으면서 왜 안 하냐고. 관심 없는 이에겐 잔소리도 하지 않는 법. 나는 그 관심이 고마워서 검진을 예약했다. 그리고 검진 후 결제를 하러 앉았을 때, 직원분이 말을 건네셨다. 

"저... 다른 병원을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일 역시 드라마에서나 등장하는 것인 줄 알았다. 대학병원과 연계되지 않은, 건강검진만 전문으로 하는 센터를 찾았던 나는, 직원이 시키는 대로 지도앱을 열고 근처 병원 검색을 시작했다.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초음파를 받았고, 그 병원에서는 소견서를 써주며 세포검사를 할 수 있는 또 다른 병원을 '오늘' 찾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을 했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며, 정말 온갖 감정을 다 겪었던 것 같다.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온갖 상념들 중 가장 강렬했던 생각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제발, 누가, 가방이라도 좀 들어주면 좋겠다.'


대장내시경까지 받은 건강검진 날이었다. 대장내시경을 위해서는 장을 비워야 했고, 물을 섞은 포카리스웨트 맛이 나는 설사약을 마시며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린 후였다. 머리는 멍했고, 금식으로 인해 배도 매우 고팠다. 검진 후에 주변 식당을 검색하려던 계획은 주변 병원을 검색하는 것으로 대체 됐고, 세포검사를 받으려 두 번째 병원을 향해 갈 때즈음엔 가방이 너무 무거워 길바닥에라도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거웠다. 우산도 가방도 젖은 옷도.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핸드폰을 뒤적대기도 했지만 이내 덮어버렸다.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무게를 괜히 남에게 지워서, 타인의 하루까지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무겁다한들, 다 내 몫의 무게일 뿐. 그렇게 또 다른 병원을 찾아가 세포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 세포검사 결과를 들으러 와서 암선고를 받았다. 병원을 나서서는 눈앞에 보이는 버스정류장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맑은 날씨. 우산도 젖은 옷도 없었지만 여전히 온몸은 무거웠다. 간호사가 건네준 온갖 서류들을 통째로 쑤셔 넣어버린 가방을 옆에 내려뒀다. 나는 그 순간 가방을 냅다 바닥으로 집어던지며 미친년마냥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아내고 있었다. 

"나 좀 가만 냅둬!!!!!"

대상도 알 수 없는, 참으로 근본 없는 분노가 드글드글 끓어올랐다. 제발 나 좀 가만 냅둬. 이만큼이나 힘을 내서 살고 있는데, 또 어떻게 힘을 짜내. 나는 못해. 제발 나 좀 냅둬!!!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스토커랄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다가, 장난으로 돌을 하나씩 하나씩 던지는 듯한 느낌. 보이지 않는, 악동 같은 녀석이 폴짝폴짝 뛰며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혼소송 끝나고 살 만했지? 너 긴장 풀렸지? 에이, 그럼 안되지. 미쳤냐? 빡 긴장하고 살아야지. 안 그래?  






5월 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갑상선암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나는, 검색을 시작하고서야 암 중에서도 꽤 가벼운 것이 갑상선암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임파선 전이는 있었으나 초기였으니, 불행 중 다행이기도 한 상황. 그럼에도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사람들은 갑상선암을 '착한 암'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그 단어를 통해 안도하기도 했지만, 암이 '있다'와 '없다'는 것 그건 정말 엄청난 차이였다. 

'수술 후 잘 관리하면서 살면 되. 친구의 지인도, 또 다른 누구도, 또또 다른 누구누구도 수술하고 잘 지낸대.'

이성적으로는 분명히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연한 공포와 불안에 완전히 잡아먹힌 상태로, 수술 전의 날들을 보냈다. 이렇게나 무서워 벌벌 떨다니. 나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왜 이러는 거야,를 스스로에게 묻다 어느 순간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아마도 암과 수술 그 자체에 대해 엄청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와 내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CT에서 안 보이던 암이 몸에 있으면 어쩌지? 수술하다가 중단되는 거 아니야?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 길로 퇴원 못하고 계속 보내게 되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사고과정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 사고를 멈추는 게 너무 어려웠다. 아무리 다독이려 해도, 마음은 자꾸만 무너졌다. 그럼에도, "괜찮아?"하고 묻는 사람들을 마주하면 '웃으며' 말했다. "괜찮죠. 괜찮죠. 수술하고 관리해야죠" 호기롭게 외쳤다. 상대의 걱정 어린 눈빛. 이건 정말 이상한 비유지만, 이혼에 대해 말할 때가 절로 떠오르는 날들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도, 타인의 일상에서 '걱정거리'가 되는 것도 정말 진저리 나게 싫었다. 남에게 괜찮음을 연기하느라,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 짜냈다. 그리고 혼자가 되거나 대나무숲을 찾는 날이 되면 어김없이 울었다. 무서워, 암인 것도 무섭고, 수술하는 것도 무섭고, 죄다 너무 무서워. 참... 서럽게도 울어댔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나' 외치며 나사 빠진 듯 살아가고 싶은데, '이 구역의 불쌍한 년'이 되어버린 느낌. 그게 정말, 싫었다. 


이제 수술 후 2주가 지났다. 전남편이 아이를 3주간 맡아줬고, 나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가 없는 3주를 보내고 있다. 잠-잠-잠으로 이어지는 날들. 암 수술쯤은 받아야, 홀로 쉴 수 있는 이 상황이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양육비도, 양육을 위한 시간도 전부 내 몫인 건가. 어째서? 병이 난 몸으로, 모두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게 맞나? 

수술 전엔, 3주 즈음이 지나면 정상 기력으로 회복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황당할 만큼 기력이 없다. 샤워도 가능하고 머리 감기도 가능한데, 그 둘을 연달아하면 머리를 말릴 힘이 부족한 느낌? 잠시 쉬었다가 다시 위잉-하고 드라이어기를 움켜쥔다. 가소로운 체력. 이 글 역시, 쓰다 멈추고 쓰다 멈추며 여러 날을 붙잡고 있다. 오늘은 기필코 끝을 내겠다,는 마음을 먹은 게 벌써 며칠 째. 오늘은 끝낼 수 있을까. 주변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쉬라고 말을 했지만, 그럼에도 조급함이 일어난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체력이 돌아오면 좋겠다. 이건 수술 후유증일까, 갑상선 약 때문일까, 혹시 몸에 다른 병이 자라나... 이 불안을 이겨내려면 결국 체력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고, 그러니 조금씩이라도 움직이고 싶어 진다. '무리를 하지 않는 선'이 어디인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참, 버거운 몇 달이었다. 고작 갑상선암으로 유난 떤다는 생각을 스스로도 하고 있지만, 어쩌겠나. 내가 나약한 인간인 것을. 이혼 후 조금만 더 에너지를 채울 시간이 흐른 후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돌아봐도, 정말 정말 정말 버거웠다는 느낌만 가득하다. 그리고 이렇게 휘청일 때마다 주변을 다시 보게 된다. 홀로. 홀로. 홀로. 그렇게나 다짐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암 수술을 받기는커녕 내 마음 하나 못 이겨내고 쓰러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어지는 안부 연락, 전해지는 음식들까지 모두, 두 손 가득 움켜쥐고 까득까득 씹어먹으며 지내고 있다. 다 먹어치우고 회복하고 말리라 다짐하면서. 


요즘은 생각한다. 달아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지 어쩔 텐가. 버겁다한들, 뭘 어쩔 수 있나 내 삶인 걸. 내가 껴안아야지. 버거는, 먹으면 사라진다. 물성을 가지고 또렷이 존재했다 한들, 내가 그것을 먹어버리면 내 뱃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거. 이 버거움도 모두, 먹어서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천천히 천천히, 모두 먹어치우고, 소화시켜 버리고, 똥으로 싸버릴 테다. 까득까득. 냠냠. 쬽쬽. 꺼억. 뿡!


그래. 나는, 안다. 어떤 식으로든, 결국은 지나간다는 것을. 벌써 '지난 몇 달은 정말 버거웠다'하고 과거형으로 문장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이 시간도 결국은 과거가 될 테고, 앞으로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는 인생이므로 잠시 쉬었다가 다시 힘을 내면 되는 거다. 살아가면 살아질 테니. 그렇게 살아내서, 내가 받은 이 마음들을 꼭 되돌려주고도 싶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다 보면, 마음도 몸도 회복되지 않을까.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까. 



(+) 한 번에 끝을 못 내서... 길고 긴, 글이 되었네요. 그리하여, 휴직을 하였습니다. 체력회복 삼아 뭐라도 써볼 예정입니다. 다들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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