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의 겨울이 생각나는 날씨야.'
혼자 생각하고 연이어 피식 웃어버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었달까. 삿포로라니. 우리나라에서의 추운 날도 많았을 텐데, 왜 굳이 짧디 짧은 해외여행에서의 기억을 소환해 버린 걸까. 횡단보도에 서서 패딩점퍼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며, 내리는 눈발을 바라봤다.
수년 전,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버거웠던 날들이 있었다. 하루하루. 매일매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던 그 시절, 내 삶은 불행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상 사람 죄다 행복한데 나만 불행해. 내가 제일 힘든 것 같아. 그 불행의 대부분은 결혼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었고, 결혼이라는 선택을 해버린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매일 나를 괴롭혔다. 그래, 어쩌면, 그 시절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버거운 상황들이 이어졌고, 그 모든 버거움을 정신없이 감당하며 지내고 있었음에도, 나는 나를 전혀 돌봐주지 못했다. 한껏 몰아세우고 괴롭혔다. 나 따위, 결혼이라는 선택을 해버린 나 따위, 내가 저질렀으니 평생 이렇게 살아야지 별 수 있나.
숨을 쉬고 싶었다. 이렇게 미운 나라고 해도, 숨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계획해 버린 지인과의 해외여행. 돌아보면 사치스러움이 철철 흘러넘친다. 충동적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비행기를 탈 만한 경비, 아이를 봐줄 사람, 회사 휴가 등이 갖춰져야 가능한 것이니까. 당시에는 내가 누리고 있던 이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 같다. 자기 비난과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에겐, 삶의 장점 따윈 도통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그리고 삶의 어떤 순간들은, 지나고 나서야 곱씹고 곱씹은 후에야 명확히 보이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떠났다. 한겨울 삿포로로. 다른 일정 대부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한순간. 오르골당이 유명하다는 '오타루'라는 동네에서 시계탑을 마주했던 때만큼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오타루에 들어설 때부터 영화 세트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눈이 골목골목 지붕지붕마다 쌓여있었는데, 이렇게나 많은 눈을 스키장도 썰매장도 아닌 곳에서 만난 적이 처음이었다. 현실감이라곤 없었다. 엄청나게 춥기도 했다. 손발이 저릿저릿. 낯선 감각들을 느끼며, 쏟아져 나오는 입김에 뿌예진 눈으로, 이 엄청난 눈밭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하며 걸어야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음악소리가 들렸다. 바닥으로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렸을 때, 사진으로만 마주 했던 오르골당의 시계탑이 눈앞에 서 있었다. 정시마다 울려 퍼진다는 시계탑의 음악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아얀 세상에서 울려 퍼지는 멜로디를 들으며 나는 울어버렸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저 때가 됐다는 듯, 눈물이 툭 터져 나왔으니까. 시계탑 주변은 관광객으로 가득했고, 대부분이 시계탑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터뜨리고 있었지만, 나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엉엉 울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정말로 펑펑 울어재꼈다. 왜 그랬던 걸까.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어서? 혹은 그 비현실적인 순간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커서? 고개를 숙인 채 엉엉 우는 그 순간에 현실의 목소리도 또렷이 들려왔었다. 보이지 않는 손아귀 같은 것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느낌.
'어딜 감히, 너 따위가 어딜 감히 행복하려고. 여긴 비현실이야. 현실로 돌아와. 절대로 달아나게 두지 않아.'
그 시절의 삿포로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내리는 눈발을 바라봤다. 지그시. 참 새삼스러웠다. 당시 나를 괴롭히던 많은 문제들, 그 모든 것들이 과거의 일이 되어 있었다. 길고 캄캄한 터널 하나를 지나온 듯, 최근 몇 년의 시간들이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지금, 그 모든 문제들에서 멀어진 채 횡단보도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머리채를 휘어잡는 손아귀 같은 것은 잊은 지 오래. 멀리멀리 바다 건너까지 떠나지 않아도, 하루하루 무탈하고 평안한 날들이 이어진다. 이것이 내 앞의 진짜 현실. 과거를 돌아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깊이, 현재의 벅찬 평화가 들어올 수 있도록.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질문 하나.
'그래서, 지금 나는 행복한 거야?'
피식 웃음이 났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말했더랬다.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행복한가? 심각한 문제는 없는 소소한 일상, 다툼과 옥죔과 다그침도 없는 평화로운 하루, 내 시간과 내 월급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정말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철학자의 예언처럼 생각은 이내 돌아선다. '정말 행복해? 정말?' 이번엔 불행의 요소들이 눈앞에 들이닥친다. 애 키우는 이혼녀.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은 늘 부족하고 풍요와는 거리가 멀고 양육비는 끊긴 지 오래됐다. 일상을 누리며 살기보다 책임감만 겨우 짊어진 것 같은 이 생활을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충분히 불행한 상황에서 나 홀로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흰색-검은색을 연달아 밟으며 길을 건넜다.
흰색.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지 않아?
검은색. 어쩌면 나는 불행한 게 아닐까?
다시 흰색.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또다시 검은색. 남들 눈엔 불행해 보일 걸?
횡단보도의 끝에서 생각해 본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지금 결론 내버릴 필요가 있을까. 바닥까지 내려앉아 불행을 끌어안고 있다가도, 문득 스며드는 다정한 순간들에 깊이깊이 행복을 느끼기도 하는 일상. 이렇게나 굽이치며 이어지는 날들을 한 단어로 정의 내려버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시 질문해 본다. 그래서 지금 할 일은 뭔데? 나를 돌보며 오늘을 보낼 것. 들이닥치는 모든 순간들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겪으며, 나라는 존재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살펴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과 걱정에 시달릴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그리고 고작 이 나이에 행복이니 불행이니 결론 내려버리는 건, 여전히 남은 생에 섣부른 이름을 붙이는 것만 같다. 섣부르다. 이르다. 아직은.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횡단보도를 밟고 선 듯 살아가는 게 아닐까. 흰색 검은색의 반복. 행복한가 불행한가 끝없이 자문하며.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어디로 가는지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다들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단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시간에 몸을 맡기고. 그래사 다들 바빠 보이는 지도.
가늘게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목 끝까지 채운 패딩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본다. 모두가 그러하듯, 나도 움직여 볼 수밖에. 타박타박. 길은 어디로든 이어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