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지. 사랑이라는 말을 쓰자마자 슬픔이라는 단어가 연달아 떠오르는 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내게 두 단어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들어있는 것 같다. 사랑, 그리고 슬픔.
슬픔과 함께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연이어 떠오르는 말이 '모성애'인 것 같다. 사랑. 그것은 무조건적인 헌신과 내어줌과 정성 같은 것들을 상상하게 만드니까. 사랑의 대표 주자는 모성애쯤이 아닐까. 모성애를 표현하는 많고 많은 말들이 있지만, 내가 느낀 모성애는 책임감과 결이 유사했다. 무조건적인 헌신? 그런 건 모르겠고, 나를 누르고 눌러 엄마라는 역할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게 하는 것. 엄마에게서 받기만 할 때는 몰랐지만, 막상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그건 정말 무거운 역할이었다. 모성애라는 신의 속성을 타고 나지 못한 부족한 인간 나부랭이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시간과 정성을 육아에 바쳐야 한다는 건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가슴 벅차게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들도 존재하지만, 꽤 자주 버겁기도 한. 그 버거움을 묵묵히 감수했던 엄마라는 존재가 나이가 들수록 사무치고, 내 곁엔 없는 그 존재 때문에 모성애는 여전히 내게 슬픈 느낌의 단어로 남아있는 듯 하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랑이 바로 타인과의 사랑 아닐까. 사랑에 빠졌다, 사랑을 한다 등등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두루뭉술한 상태로 서술되는 그 모든 감정. 한때의 나 역시 그런 것에 흠뻑 빠졌던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놀렸던 '세기의 사랑'. 그 끝은 처참했다. 길고 길게 아팠고, 소송이라는 엄청난 과정을 겪어야 했었다. 그리고 판사의 판결에 따라 '끝'을 선고 받았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현실감을 잃게 만드는지를 꽤나 아프게 배웠다. 사랑했던 상대와 싸우고 공격받고 견뎌내는 그 지난한 과정들. 이 모든 과정을 거쳤기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슬픔으로 이어지는 것이 내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인간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가끔 '다음'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상상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회복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어쩌면 그 처절했던 시간 모두를 잔잔한 수면 아래로 밀어 넣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물 아래, 평온한 일상 이면에 어떤 감정이 웅크린 채 남아있는지 나는 여전히 헛갈린다. 날선 감정과 공격적인 말과 낯선 화들이 울컥 울컥 솟구쳐 오르는 순간들이 내겐 남아 있고, 모두 흘러간 것이라 생각했던 생채기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느끼곤 한다. 그것이 내게 남은 슬픔의 크기가 아닐까. 빙산처럼. 물 위에서 보이는 건 일부분일뿐.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얼마나 거대한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 슬픔을 직면하면서, 현실적인 고민들도 이어진다. 그 다음 무언가를 원할 만한 상황이 맞나. 내겐 아이가 있고 물리적인 시간 자체가 별로 없는 걸.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음을 절절히 깨닫고는, 아아 어쩌면 이번 생에 다음이라는 건 들어설 여력이 없겠구나 생각했다. 또한, 책임질 아이가 있는 이혼녀라는 타이틀. 이것 역시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확고하고 확실한 나의 상황. 잔뜩 움츠러든 내 모습엔 스스로도 이질감이 들었다. 그건 평소의 내가 아니었다. 보통 때는 '나 잘 살고 있잖아?'하는 자신만만한 생각을 자주 하는 주제지만, 다른 이의 앞에 놓여있는 스스로를 생각하면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찌부러진 '나 아닌 내'가 누군가를 당당히 마주볼 수 있을까. 이런 내가 다음은 무슨. 기대는 버리고, 달콤한 상상 또한 끊어버리는 편이 어울리는 상황인 것을.
지인들과 만날 때마다 내 곁의 빈자리를 느낀다. 지인들은 잠깐씩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남편에게, 혹은 애인에게 연락하는 모습들. 늦은 시각 연락할 사람도 없는 나는 인스타만 들여다본다. 사람 인(人)이라는 한자는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쓴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우스웠다. 기댈 데 없이 우뚝 선 나는 人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일까. 오우, 스스로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한자의 의미에 빗대어 보면 사람 아닌 다른 그 무엇인 게 분명해 보였다. '1'이라고 불러볼까. 나는 1의 존재로 친구들을 바라봤다. 웃으며 폰을 보는 사람들과 그들을 관찰하는 나의 모습.
사랑이라는 단어를 굳이 택해 글을 써보자 생각한 나는, 어쩌면 꽤 외로운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2년 여의 소송도 끝이 났고,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몰아갔던 퇴고도 끝이 났고. 그야말로 여유롭게 두 달 쯤을 보냈다. 태평성대에서 느껴지는 건? 사치스럽게도 외로움인 것 같다. 주변이 모두 혼돈의 상태일 때는 느껴본 적도 없던 외로움이라는 녀석이 슬쩍 고개를 들이밀고, 녀석의 눈을 마주하곤 나는 좀 놀라버렸다. 이렇게나, 사치스럽고 풍요롭게 감정을 느낄 상황이라니. 얼마나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나란 인간.
생각해본다. 사랑할 상대가 있었을 땐 이 외로움이 없었던가.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 때에도 나는 꾸준히 외로웠었다. 그건, 남이 채워주지 못하는 결핍이라고 스스로도 결론냈던 문제였다. 결핍을 채우는 건 영원히 평생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지치지도 않고, 결핍을 채워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대체 이유가 뭘까. 결핍을 채우려는 헛된 욕망이 '친절'과 '호감'을 헛갈리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호감인지 어장관리인지 괴로워하는 아는 동생의 고민을 들으며 생각했었다. 사람의 '기대 심리'가 이 고민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나를 좋아하는 누군가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 심리. 이 결핍을 채워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는 기대 심리. 그런 헛된 기대를 품으니 뜬금없는 상대의 행동을 이리저리 복기해보게 되고, 그의 진심이 나를 향한 것이길 상상하게 되는 것 아닐까. 한때의 친절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고 망상에 잠기는 건 결국, 상대의 행동 그 자체보다 사람 안에 존재하는 기대 심리가 문제인 것 아닐까.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헛되고 헛된 기대.
그 헛된 기대에 어울리는 단어가 바로, 모두가 아는 그 사랑이라는 거 아닐까. 사랑, 그거 대체 뭘까. 포털사이트 사전에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라고 사랑을 설명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두루뭉술하고 불확실한 설명이라니. 기본이라고? 사랑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싶은 나같은 사람에게, 그것을 기본이라 설명하니 여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40대가 되어버린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사는 게 참 만만치 않다고. 때론 버겁다고. 이 버거운 여정에서 기본이란 건 대체 무엇일까 고민할 무렵, 문득 한문 사랑 애(愛)에 대한 해설이 떠올랐다. 사랑 애자는 마음 심(心)자를 감싸고 지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했던가. 사랑. 사전의 설명보다는 마음을 감싸고 지키는 것이사랑이라는 해설이 좀 더 이해가 쉬웠다.
그래, 어쩌면 사랑은, 버거운 인생 여정에서 마음이라도 지켜가고 싶은 그런 많은 이들의 바람을 담고 있는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기댈 곳 하나 마련해 서로 기대며 사람(人)답게 살아가고픈 바람. 그래서 온 세상이 사랑 사랑 노래를 부르는 건아닐까. 그렇게라도, 살아갈 힘을 찾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