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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Nov 23. 2023

시간을 붙잡아둔 나의 동네, 미아동의 기록

우리,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갈까요?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간다. 시간의 흐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 또한 숨이 가쁘다. 오래된 것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손에 한 움큼 쥔 모래알처럼 있었다가도 없었던 듯 금세 흩어져 버리고 만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 가서 추억을 되짚어 보려 해도, 이미 옛 흔적은 깨끗하게 지워져 나는 그곳에 산 적 없는 이방인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요즘 세상의 속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곳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번동 꼭대기라고 불리는 미아동의 이야기이다.

 

  오패산이 품고 있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사실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태어나서 쭉 서울시민으로 살다가, 경기도민이 된 지 1년 2개월 만에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부동산을 통해 처음 소개받은 집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인데, 중개사님 차를 얻어 타고 뒤로 미끄러질 듯 아찔한 오르막길을 한참 오른 후에야 집을 둘러볼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짙은 청록색의 신발장이 먼저 반겨주었다. 화장실에 깔린 핑크색 바닥 타일과 자주색의 세면대, 그리고 같은 색의 변기가 이 집의 연식을 말해주었다. 거실은 따로 없는 15평의 오래된 주택. 그런데도 방은 세 개인 데다 앞뒤로 베란다가 있는 구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사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된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을 꼽자면, 집 뒤로 바로 숲길이 연결되어 있고 작은방 창문으로는 오패산과 북한산이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5월이 되면 그 창을 통해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풍경을 볼 수 있는데, 바람이 조금만 불어와도 집 안 가득 꽃향기가 만발해서 마치 내가 꽃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슬리퍼를 신고 집 주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일명 '슬세권'이 각광받는 시대에, 이 동네의 불편한 점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지하철을 타려면 숲길을 관통하여 굽이치는 계단을 끝도 없이 내려가야 하고, 집 근처의 대중교통은 노선이 길지 않은 마을버스 한 대가 전부이다.

  비가 많이 오는 날 경사로를 오르다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물로 신발이 망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눈이 오는 날은 또 어떤가. 하염없이 쌓이는 눈을 미리 치워두지 않으면 길을 걷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깝다.

  대형마트가 없는 것은 온라인으로 대체 가능하니 그나마 불편한 점에 속하지도 않는다. 손님이 찾아올 때는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골목마다 같은 형태의 주택들이 즐비하게 붙어있다 보니 목적지가 어디인지 찾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차로 좁은 골목에 잘못 진입하면 빠져나가는데 진을 빼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단점에도 내가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는 어릴 적 내가 자랐던 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고도의 차이 정도랄까. 그 외에는 내 기억 속 뿌리 깊이 자리한 어린 시절의 우리 동네와 흡사해서 그 시절로 회기 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이곳은 아직도 낭만으로 가득하다. 시골에 가면 마을마다 있는 느티나무 밑 평상처럼, 우리 동네의 작은 마트 앞 평상 또한 동네 이웃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마트 사장님과 이웃 주민들 몇몇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오며 가며 눈인사를 나눈다. 주거 연령대가 높은 지역이다 보니, 동네 골목골목을 산책 삼아 다니시는 어르신들이 많은데, 자주 마주쳐 낯이 익은 분들과는 이제 가벼운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하원을 하다가 알게 된 할머님 한 분은 1남1녀를 두고 계신데, 마흔이 넘은 아들은 아직도 혼자고, 시집을 간 딸은 손주를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했다며 아쉬운 마음을 털어놓으셨다. '복실이'라는 정감 있는 이름과는 달리 늠름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개를 키우는 할아버지와도 이제는 마주치면 늘 인사를 한다. 옆 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것이 당연시된 요즘, 아직도 이런 정서가 남아있는 우리 동네가 나는 너무나도 좋다.


  콘크리트의 균열 사이를 비집고 뿌리를 내려 피어나는 이름 모를 들꽃들, 집집마다 빨갛고 큰 고무 대야에 심겨 성실하게 열매 맺는 고추와 가지 같은 채소들, 그리고 담벼락을 타고 올라 전원의 풍경을 만들어주는 덩굴 식물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서울에 살면서도 이렇게 자연을 벗 삼은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하지만, 이곳도 재개발의 열풍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서울시의 사업타당성 검토가 완료되었고, 주민 투표 결과 정비 사업 찬반여부에서 과반수를 넘어 동의 결정이 났다. 언젠가 재개발이 본격화된다면 이곳의 풍경 또한 사라지겠지. 그러면 나는 또 이곳의 기억을 추억으로만 간직하게 되지 않을까.

  나와 아이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는 이 동네가 재개발이라는 명목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면 나는 매우 슬플 것이다. 하나 간절히 바라는 점이 있다면, 아이와 함께 산책하는 숲만큼은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세상이 아무리 재빠른 변화로 숨 가쁘게 돌아간다 한들, 하나쯤은 예전 그대로인 것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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