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오래도록 기억될 블루베리 생크림 케이크
푸릇하던 나뭇잎이 울긋불긋 물들어가고 점점 바람이 차가워질 때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작은 베이커리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12월 초, 크리스마스 준비로 케이크 샘플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던 날이었다. 크림치즈 프로스팅을 올린 당근케이크와 블루베리 시럽으로 장식한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고 나머지 업무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한 중년의 남성분이 들어왔다. 그 손님은 혹시 지금 바로 케이크를 구매할 수 있는지 물었다. 제빵사가 두 명뿐인 매장이라 케이크는 이틀 전 예약이 원칙이므로 죄송하지만 지금 구매는 어렵습니다,라는 죄송한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손님은 빈 손으로 돌아갔다.
내가 받은 한 통의 전화
따르릉. 매장 전화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하고 길게 늘이는 말 줄임표 뒤에 주저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 네, 말씀하세요.
- 아까 잠깐 들렀던 사람인데요, 안 되는 건 알지만 진짜 오늘 꼭 케이크가 필요해서 그런데... 어떻게 좀 구매할 수 없을까요?
디저트든 빵이든, 만드는데 보통 시간이 드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케이크는 시트를 구워야 하고, 그 시트를 식혀야 하고, 최소 반나절 정도의 숙성 시간도 필요하다. 크림을 만들어 시럽을 바르고 아이싱이라는 작업을 한 뒤에도 일정 시간의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손님의 손에 전달될 수 있다. 작은 매장의 경우에는 항상 시트를 준비해 둘 수 없어 하루도 빠듯한데, 당장 오늘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재차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며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통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 아, 네......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다음번에 필요하실 때 예약 주시면 꼭 준비해 드리도록 할게요.
끈질긴 손님은 포기를 몰랐다
퇴근시간이 10분쯤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번의 방문과 한 번의 통화를 했던 그 손님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는 큰 키가 무색하게 허리를 숙이고 두 손을 합장하며 애절하게 말했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다. 이미 두 번의 거절을 당했음에도 중년의 남자가 어찌 저리 모든 자존심을 내려가며 케이크를 팔아달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쯤 되면 그의 이야기를 안 들어볼 수 없었다.
- 사실...... 제 아내가 많이 아픕니다. 위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아내가 케이크를 참 좋아해요. 의사가 밀가루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데 여기는 쌀로 만드니까 괜찮지 않을까 해서... 여기서 가끔 빵을 샀는데, 아내가 그 빵은 먹어도 소화가 잘된다고 하더라고요. 제발... 어떻게 좀 안될까요? 이번이 마지막 케이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든 꼭 케이크를 사주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 말을 듣는 내내 수많은 생각이 가슴을 할퀴고 갔다. 그렇게 거절을 당하면서도 간절히 케이크를 사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케이크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손에 케이크를 들려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크리스마스 샘플 케이크가 두 개나 있었다.
- 지금 바로 케이크를 만들어 드리기는 어렵지만, 저희가 크리스마스 판매용 샘플로 오늘 만든 케이크가 있어요. 당근케이크, 생크림 케이크 두 개가 있는데 그거라도 괜찮으시겠어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눌러가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성적인 말투로, 하지만 차갑지는 않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그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떠나가고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연신 꾸벅 허리를 숙이며, 정말 감사하다고, 또 감사하다고 수도 없이 인사를 반복했다.
판매용 샘플이라 더욱 정성을 기울였던 탓에 케이크는 더 손댈 곳이 없었다. 그가 고른 생크림 케이크를 포장하며 마음을 한 번 더했다. 이게 마지막 케이크가 아니기를. 내년 12월에도 아내분과 함께 케이크 초에 불을 붙이고 더 원대한 소원을 빌 수 있기를.
들어올 때와 다르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손님은 케이크를 들고 떠났다. 퇴근 시간은 이미 30분쯤 지나있었지만 그건 별 일도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아내에게 케이크를 건네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마침 케이크가 필요했던 순간에 샘플 케이크가 있었다는 것도 기적처럼 느껴졌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몇 년이 지난 일이고 그를 마주한 것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날이 추워지면 그 손님이 종종 생각난다. 아내분은 병마를 이겨냈을까. 그래서 두 분은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여기저기 함께 여행도 다니고 계실까. 내가 더했던 그 작은 마음이 또 하나의 기적처럼 닿아 그저 잘 지내고 계시기를 바란다. 쌀케이크뿐만 아니라, 밀가루로 만든 케이크를 드셔도 괜찮을 만큼 아주 잘 지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