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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pdolee Oct 25. 2020

익숙하죠,
제가 좋아하던 겁니다.

나를 소개하기가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2/3)


 이전 글에 이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브랜드 매니저라는 일이 제게 잘 맞는 일인지는 아직 모른다는 거죠. 제가 그럴싸한 경력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지금부터 잘 맞는 일인지 직접 부딪혀봐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제가 하는 일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네요.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스타벅스로 예를 들어볼게요. 물론 이건 제 상상을 기반으로 한 내용이니까 실제 업무는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있고 전문적일 거예요. 잊지 마세요. 이 글에 신빙성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습니다.


 지금 스타벅스는 할로윈 프로모션을 하고 있어요. 이 프로모션 하나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무지 많죠. 자, 우리 함께 스타벅스 출입문 앞에선 고객에 빙의해봅시다. 들어가려고 출입문 손잡이를 잡았어요. 왼쪽 문 놉! 오른쪽 문에는 할로윈 프로모션을 알리기 위한 스티커가 붙어있죠. 귀여워요. 들어갔더니 머지않아 프로모션 배너가 보이네요. 할로윈 느낌이 줄줄 흘러요. 이건 여담인데, 요즘 스타벅스 코리아는 할로윈을 거의 명절 급으로 챙기는 느낌이에요.


 이제 주문할 차례예요. 포스 뒤에 계신 파트너님 머리 위로 할로윈 음료가 새로 나왔다는 포스터가 대문짝만하게 붙여져 있네요. 그 옆으로는 메뉴 보드가, 반대로는 다른 프로모션 음료들이 보여요. 고민만 30초 때리다가 주문을 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가져갈게요." 프로모션 음료를 쓱 훑어보고 결국 아메리카노로 돌아오는 건 국룰이죠. 이럴 거면 왜 고민했나 싶어요. 국룰 하나 추가하자면 음료를 기다릴 때는 뒤돌아서 MD를 봐줘야 해요. 예전만 못해도 스타벅스만큼 MD 마구 찍어내는 곳 없잖아요. 붕대로 칭칭 감긴 디자인의 머그잔이라도 하나 구경해볼까 들었더니 음료 나왔다고 부르네요. 어떨 때 보면 자판기보다 빨라요. 제가 일할 때도 느꼈지만, 이 분야는 기계가 사람 못 쫓아갈 듯요.


"저 따뜻한 거 시켰는데요?" 아, 뻥입니다.


 이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게요. 스타벅스 코리아가 제 직장이고 기획자, 디자이너, 마케터가 없다고 가정해보세요. 물론 제가 일하는 곳은 스타벅스 코리아가 아니지만, 지금 우리 회사에 저기 적힌 세 직군이 없는 건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에요. 대충 "우리는 할로윈 프로모션을 할 거야!"라는 흐리멍덩한 말 한마디로 기획 업무가 시작돼요. 육하원칙을 노린 건 아닌데, 마치 몸에 밴 습관처럼 육하원칙에 따라서 글이 나와버려요. 음료도 기획해야 하는데, 다행히 음료 개발팀에는 사람이 있네요. 대신 MD는 제 몫이죠. 꽤 인기 있었던 상품들을 리스트업해서 이번엔 디자인 그대로 색만 바꿔서 내볼까 해요. 호박색으로 바꾸고 해골 하나 그려 넣으면 그게 곧 할로윈 MD 아니냐며 자신감도 가져봅니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이 할로윈 프로모션을 어떻게 고객들에게 알릴지 고민해요. 인스타그램 마케팅은 필수고요. 스토리 기능으로 재미 좀 보려면 고민의 깊이는 더 깊어지죠. 그러고 보니 메뉴 보드에 들어갈 메뉴판도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같은 디자인을 우려먹기는 또 눈치 보이니 한 번 갈아엎어 줘야 해요. 정 아이디어가 없으면 얘도 컬러만 바꿉니다. 하지만 프로모션 포스터는 필수예요. 다행인지 몰라도 할로윈 같은 시즌 프로모션은 수월해요. 다들 할로윈 하면 해골이며 호박이며 떠올리는 게 비슷하니까요.


 근데 여러분, 스타벅스에서 모니터 보신 적 있어요? 주문번호 뜨는 그 조그마한 모니터 말고는 아마 고객이 볼 수 있는 모니터는 없을 거예요. 그 말은 곧 방금 만든 포스터를 인쇄해야 한다는 의미죠. 인쇄 업체로 파일을 넘겨서 이 포스터는 이 사이즈로 몇 개, 저 포스터는 저 사이즈 몇 개 주문을 넣어봅니다. 두근두근. 택배가 도착했는데 오타가 있네요, 미친. 4K니 뭐니 모니터 사양은 높아져만 가는데, 이놈의 오타 쉑은 왜 작업하면서 안 보였던 걸까요? 조심스레 인쇄 업체 직원이 악의를 품고 수정한 건 아닐까 의심을….


물론 농담이죠. 픽셀만도 못한 제 눈깔 탓입니다.


 아, 근데 제가 이 일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됐다고 했잖아요. 한 번은 친구에게 카톡으로 말했어요. 브랜드 매니저라는 일이 고상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지만, 뭔가 이것저것 다 하는 느낌이라고요. 그랬더니 친구가 브랜드 매니저라는 직업을 이해하기 쉽도록 초월 번역해줬지 뭐예요. '나 혼자 다 하조'라고요. 이 익숙한 느낌! 학교 팀플하던 시절이 마구 떠올랐어요. 제 명함에 'Brand Manager' 지우고 'Na Honja Da Hajo'를 새길까 봐요. 얼마나 직관적이에요.


 놀랍게도 이것저것 다 하는 일이 (아직은) 저에게 잘 맞는다는 거예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새로운 툴이나 환경에 적응하는 일도 잘하니 어쩌면 천직 같기도 하고요. 10년간 엄두도 못 냈던 일러스트레이터를 일 시작한 지 2주 만에 꽤 쓸만한 수준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먹고 살기 위해선 못 할 게 없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 차라리 제가 1부터 100, A부터 Z까지 모두 직접 하면서 통일감을 가져가야 마음 편한 성격도 한몫하고요.


 다행히 결재와 결제를 담당하시는 대표님께서는 저를 아이돌 그룹 센터마냥 잘 밀어주고 계세요. 흡사 부모의 마음 같달까요. 일을 정식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계약서를 쓰던 날, 대표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종훈 님의 색을 입혀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냥 흘러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이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미쳤다.'를 크게 외쳤어요. 개인적인 이유로 자존감도 많이 떨어져 있던 상태였거든요. 그런 저에게 브랜드에 색을 입히는 일을 맡기면서 제 색을 맘껏 입혀보라니. 이런 아찔한 도박이 또 어디 있을까요. 대표님은 타짜? 덕분에 요즘은 무한 지원을 받으며 좋아하는 일을 재밌게 하고 있어요.


 아, 길기도 길다. 요즘 주례도 이렇게 길게는 안 하는데 제가 말이 길었네요.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그냥 느껴보기 위해서예요.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할 때 있잖아요. 제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잡히셨다면 굳히기 들어가도 될까요?





나를 소개하기가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그러게요, 제가 무슨 일을 할까요?

익숙하죠, 제가 좋아하던 겁니다. (현재글)

느끼셨죠,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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