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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니 Feb 29. 2020

내가 에디터라니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특한 마음 



100930


거의 매주 일요일마다 들르는, 교회 옆 참새 방앗간 같은 카페가 있다. 오늘도 교회 가기 전에 들러 라테를 주문하는데 알바 언니가 이런 봉투를 내민다. "혹시라도 안 오시면 어쩌나 했어요." 오늘이 마지막 근무 날이라는 말과 함께. 


봉투 안에는 비누 방향제가 들어 있었다


일요일 아침,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늦게 카페에 들르면 "늦으셨죠?" 조용히 물어보며 다른 손님들에게 몰래 내 커피를 먼저 내미는 센스가 있는 분이었다. '단골 좋다는 게 뭐야' 라는 눈빛과 함께. 카페 매장이 좁아서, 가끔 본의 아니게 알바 언니가 다른 손님들과 나누는 얘기를 엿듣게 될 때도 있었다. 카페 위치상 어른 고객들이 많으신 편인데 과하지 않게 친절히 대꾸해주는 걸 꾸준히 1년도 넘게 봐왔다. 센스 있고 친절한 분. 가끔 손님이 없으면 한쪽 구석에서 문제집을 펴놓고 있길래 물어봤더니, 공시생이라고 했다. 평일에는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카페 알바를 한다고. 뭐 그것 외에,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오늘이 알바 마지막 날이라며 봉투를 내민다. 여기 있는 글도 읽어보세요, 라며 손 끝으로 가리키는 곳에 글이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그냥 '묵혀내야'하는 시간이 있다. 살기 위해 죽은 듯이 살아내야 하는 시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나는 세월의 흐름이 안겨준 재생력에 겸허히 감사해야만 했다. 


<나라는 여자>,  임경선


나라는 여자. 묵혀내야 하는 시간. 죽은 듯 살아내야 하는 시간. 세월의 흐름. 아주 짧은 문장인데도 툭툭 마음에 걸리는 단어들이 너무 많았다. 그냥 읽어 넘길 수 없는 단어들 때문에 다시 한번 또다시 한번, 마음대로 짐작할 수 없는 그녀의 의도를 생각하며 읽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묵혀내듯 살아야 했을 시간,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 시험에 붙었는지 시험에 떨어졌는지, 아르바이트는 왜 그만두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_


요즘은 자주 사랑의 표현에 대해 생각한다. 거창한 말이지만 사랑의 표현이라는 표현이 맞다. 1년간 거의 매주 봤지만 그러나 이번 주에도 또 볼 거라 장담할 수 없는, 그저 얼굴만 아는 손님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 그 마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카페에 들어서자 오늘 안 오시면 어쩌나 걱정했다며. 쇼핑백에서 뒤적뒤적 봉투를 찾아 나에게 건네는 그 마음. 봉투 위에 붙어 있던 작은 포스트잇에는 일요일, 단발 같은 나에 대한 특징이 적혀 있었다. 사랑이 아니고 뭘까. 설명이 필요한 묵혀내야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 남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그러면서 나의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회사에 들어가 정신없이 살아내고 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 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관계에 베푸는 친절함에 대해서도. 그게 사랑이지 뭐야. 표현할 수 있는 여유는 가지고 살아야지. 


마음이 따뜻하다. 




181001


아직도 적응 중이었던 회사를 일주일이나 쉬고 나왔더니 책상도 어색하고 컴퓨터 화면도 어색하고 회의도 어색하다. 어색함에 자주 몸이 삐그덕거렸다. 


그래도. 감사하게도 환기가 된 모양이다. 매사에 서둘지 좀 말자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좀처럼 차분해지지 않아 성마르게 부글대던 감정들을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게 해 준 시간이 된 모양이다. 휴가가 그래서 좋은 거지. 


그냥 열심히, 집중해서 일하고 동료 누군가의 쉰 소리에 몇 번 낄낄거리며 웃고, 회의에서 내가 낸 의견이 무사히 반영되고, 한참 졸릴 때쯤 살짝 이어폰 꽂고 좋아하는 노래도 듣고. 어김없이 칼퇴근을 하고 집에 가는 길 서늘한 가을바람이 발등을 감싸고.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인 애송이 신입 사원의 하루. 그냥 순간순간 복잡한 씁쓸함일랑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들숨 날숨으로 들이마셨다가 내쉬자. 


마음의 환기는 그렇다 치고 여행 다녀오니 누적된 육체의 피곤은 어찌 안될까. 

한 해 한 해 여독이 풀리는 시간이 다르다. 흑. 


 


181002


명함이 나왔다. (이제야 나왔다.)

내 이름 위에 쓰여 있는 글자, EDITOR.


에디터로 새로운 시작.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매일이다. 내가 에디터라니...!

원하는 '타이틀'을 얻게 되어서 매우 기쁜데, 정말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아야 할 것 같고. 

그러니 인내해야 한다. 인내에는 유독 약한 사람이라 걱정이다. 버텨야지. 


오늘 퇴근길엔 점점 더 회사에 도움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특한, 아니 철없는 소망을 품는 걸 보니 꽤 살만했나 보다. 명함의 힘인가. 아니면 내일이 빨간 날(개천절)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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