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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항재 Feb 09. 2020

99 : 1

진정한 공동체를 향한 갈망 

양 떼를 돌보던 한 목자가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중, 이 목자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양 하나가 눈에 띄지 않았다. 

급하게 다시 한 마리 한 마리 세어 보기 시작했다. 

100마리의 무리여야 하는데 한 마리가 모자란다. 

다시 세보고 또 세보아도 99마리다.  

목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았고,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있기에 빨리 99마리를 목장에 두고

찾으러 갈 수도 있지만, 목자의 마음에는 조급함이 생겼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그 길 잃은 양이 혹시라도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다면, 다시 돌아가도 찾기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혹시 양 떼를 목장에 몰고 갔다가 찾으러 나서면 해가 지고 어두운 밤이 올 수도 있다. 그러면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순간 고민이 되었지만, 결론은 지금 나서지 않으면 그 한 마리 양은 깊은 산속에 혼자 남겨져 이리의 밥이 되거나 어두운 밤길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영영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

목장은 휙하니 99마리의 양무리를 보고,

'금방 다시 올게, 조금 기다려 줘. 아기 양 찾아서 빨리 다시 올게'라고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급히 막대기를 챙겨 좀 전까지 머물렀던 산 중턱 목초지를 향해 떠났다. 

남아 있는 양 떼들도 목자에게 눈으로 이야기한다. 

'걱정 마세요. 저희는 얌전히 여기에서 목자님을 기다릴게요. 우리 어린양을 빨리 다시 찾아서 오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당신의 목숨은 얼마입니까?

현재의 경제적 관점에서는 투입 대비 산출, 효율성 등이 중요한 의사결정의 기준이다.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는 경제적 관점에서는 어리석은 투자자, 바보 같은 경영자로 불러도 좋다. 


너무나 익숙한 분석, 비교 그리고 최적의 의사결정. 생산성, 효율성 이면에는 결과가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약간의 희생, 소수의 포기는 당연하다는 논리가 있다.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에서는 한정된, 제한된 자원을 생각하면 결과가 가장 좋은 곳에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수가 혜택을 받고 이득이 있다면 소수의 손해는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리고 지금 성인이 되어서도 이 논리와 가치 기준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소중한 것부터 우선해라', '20:80의 법칙', 'ROI' 

이런 경제논리와 가치판단 기준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의 목숨, 생명을 논의할 때는 다른 관점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중국에서의 상황이 그렇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의 돈이 드는데, 그 돈이면 다른 수많은 불쌍한,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지 않은가? 

한 사람 때문에 백화점을 문을 닫고 마트가 휴업을 한다고? 그 손실이 얼마인데... 

확진자 가정을 돕는데 왜 세금을 쓰지?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까지도 구호자금을 준다고? 


모든 것을 화폐의 가치, 돈의 양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만약 그 필요한 돈이 내가 생각하는 기준보다 크다면 바로 아깝다고 생각한다. 그 생명이,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명목으로 묻어 버릴 수 있다. 

 

일본에서는 지금 크루즈 선박 하나 때문에 난리가 났다. 크루즈 안에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감염된 사람들과 며칠을 같이 보냈고, 그래서 지금 하루에도 수십 명씩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이 크루즈가 아직 정식으로 일본에 입항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된 감염이라고 국가별 확진자 수 통계에서 빼겠다고 발표를 했다. 그 선박이  일본 요코하마 항에 있지만 승객들은 아직 정식으로 입국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땅에서 발생한 확진자가 아니라는 희한한 논리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게 이런 경우가 아닐까?

올 2020년 동경 올림픽 때문에, 이 전 세계적인 바이러스 사태로 혹시라도 올림픽 흥행에 영향을 줄까 봐 이렇게 까지 한다고 이야기한다. 더 심각한 것은 이 논리 때문에 크루즈에 있는 사람들을 내리지도 못하게 한다. 

물론 입국 절차를 진행하며, 아직 모든 사람들의 감염 여부를 판단하지 못해서, 추가적인 전염이나 확산의 우려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좁은 객실에 있는 고령의 노인들, 언제든 나도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보다는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3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700명이 아니라 70명 또는 7명이라도 누군가는 이 과정에서 생명을 잃었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다. 현재 중국 정부의 판단으로는 다음 주가 가장 고비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한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의 감염 추세를 줄일 수 있다면 아마도 우한 지역에 대한 봉쇄를 유지하며 집중적인 관리를 하고 이후 2-3개월 안에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 다음 주에 각 지역의 감염자 사례가 증가하거나 제2의 우한이 생겨나게 되면, 그때는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각 기업들도 비상사태 속에 당장의 이 영업매출 '0'의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종 방안을 고안 중이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구조조정과 무급휴직 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회사가 살아야 더 많은 근로자, 노동자의 생활이 보장되니 소수의 인력을 내보내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정리된, 직업을 잃은 직원은 당장의 삶이, 생활이 위협을 받는다.

어느 누구도 소수를 위한 나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회사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나의 급여, 나의 일자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당연한 경제적 논리가 내가 대상이 되고, '나'의 이슈가 되면 소용이 없다.

 

진정한 공동체를 찾아서

 

어려운 시기다. 

중국이 국가 전체로, 국민 모두가 동시에 이런 가치관의 도전과 모순에 봉착한 것은 처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이 사태를 전후로 중국 사회 전반적인 변화가 클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사고,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는 중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속한 국가, 사회 공동체, 회사 공동체 그리고 가족 공동체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것 같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속한 공동체가 어려움이 생길 때 나를 지켜주지 못하였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대로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았고 그 보호 속에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애착이 더 높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경제논리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하는지, 아니면 목자와 같이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곳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최근에 읽게 된 어느 ('적(敵)은 사람이 아니라 바이러스다')에서 소개된 글을 인용해 본다. 

 

메르스 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살아야겠다」에서 김탁환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삶과 죽음을 재수나 운에 맡겨선 안 된다. 그 전염병에 안 걸렸기 때문에, 그 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행운'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가. 게다가 도탄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배제하려 든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마션'의 감동은 공동체가 그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경제적 손실이나 성공 가능성 따위로 바꿔치기하지 않는 원칙으로부터 온다."   


나는 99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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