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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항재 Mar 24. 2020

회복

자기다움을 찾는 것의 의미 

어느덧 재택근무 기간이 끝나고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이 돌아왔다. 

근 한 달반만에 회사로 출근하는 날은 모두가 초긴장 상태였다. 


직장인들의 회사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모닝커피 한 잔, 다 같이 먹는 점심 회동은 꿈도 못 꾼다.

회의실에 5명 이상 모일 수도 없고, 근무 중 평상시에도 마스크를 계속 써야 한다. 

출근 때 한 번, 오후에 다시 한번 전 직원이 체온을 재야 한다. 

출퇴근 때 타는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이 타면 숨을 최대한 참고 마스크가 얼굴에 밀착해 있는지 다시 한번 여미어 만져본다. 


도대체 언제쯤 정상으로 돌아갈까?



사람들이 만나면 모두가 하는 대화의 끝은 언제나 이 사태가 끝나고 정상화될까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다.

드라마틱하게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는 것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늘 가던 식당에서 즐겨 찾던 메뉴의 점심 한 끼와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잔 정도다.

답답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마음껏 이 봄날의 새파란 공기를 마시고 싶고,

얼굴이 가려워진 무표정한 눈망울이 아니라 새하얗게 이를 드러내고 방긋 웃는 얼굴을 보고 싶고,

두려워 멀리 돌아가지 않고, 달려가 악수하고 안아주고 싶을 뿐이다.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의 반대편에 서있는, 우리가 되돌아가고 싶은 그 상태는 어떤 것일까?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해 지기 직전의 2019년 말 그 시점일까? 

그때, 우리는 충분히 괜찮았었나? 행복했었나?


만약 단순히 바이러스가 세상에 퍼지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것이라면, 결국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현재의 생활에 최대한 적응하고 느긋하게 좀 기다리다 보면 확진자 수도 피크를 찍고 점차 수그러들고 혹시라도 백신이라도 개발이 완료되면 더더욱 금상첨화,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정상'의 상태인가? 우리는 그때 아무 문제도 없었던 걸까?


그래, 나는 원래 정상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 순간에 바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전 상태로의 '회귀'가 아니라 원래 그랬어야 하는 '회복'이다. 

바이러스 확진자가 원해야 하는 것은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 좋지 않은 생활습관에 젖어있던 이미 병들어 있던 몸이 아니라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 건강한 식습관으로 회복된 건강한 몸이어야 한다. 

기업들이 원해야 하는 것은 각종 할인과 밀어내기로 만들어 낸 매출이라는 숫자의 허상이 아니라 현금 창출 능력을 회복해서 지속 경영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교회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다시 예배당의 문을 열고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짠맛을 되찾아 이 사회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되찾는 것이다. 

계속되는 재택근무 속에서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스트레스와 짜증을 내고 있는 가장들은 가족과의 관계를, 부모로서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다시 교문을 열고 수업을 시작하는 것만이 아니라 학교는 잃어버린 현 교육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신의 '나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image source : https://blog.naver.com/goodwill35/221831649519


어느덧 우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가치, 그리고 나다움에 대한 판단을 맡겨버리고 살아왔다. 

성적으로 우열을 가리고 줄을 세우는 교육 시스템에 어렸을 때부터 길들여져서, 어느 대학을 나왔고, 어떤 직장을 다니는 지를 통해서, 내 급여가 얼마고 어떤 자동차를 모는지를 갖고, 내가 사는 아파트가 강남인지 강북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 평수에 사는 지를 생각하면서 나 또는 '그들'의 가치를 판단한다.


사실 돌아보면 인생에서 진지하게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몇 번의 기회가 있다.

대학 진학, 그리고 졸업 후의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며, 결혼 등등 인생의 전환점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들이다. 대부분은 몇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현재의 나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몇 번의 선택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로만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보는 게 맞는 것일까?


이 바이러스 사태는 쓰러질 까 계속 페달을 밟으면서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리고 있던 아이의 자전거를 세우고 앞에 놓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자기 자신하고만 지내는 시간,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꿈, 자신의 걱정과 바람만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는 곁에 다른 사람 없이 자신만을 벗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잊었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


그 재미있는 인생의 여러 가지 활동, 이벤트 그리고 만남들도, 미쳐 빠져들었던 취미활동과 건강을 위해 시작했던 운동조차도 강제적으로 중단해야만 하는 지금이야 말로 기회다.  

물론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온갖 영화, 웹툰, 게임 등에 빠져드는 순간도 있겠지만, 계속해서 들리는 뉴스, 그로 인한 불안감, 걱정 등이 마음의 주위를 맴돌다 보면 어느덧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잠시 동안 스마트폰도 꺼두고 SNS는 더더욱 피하고,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리고, '나 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나 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이전 회사에서 신입사원들 연수교육 시에 했었던 강의가 있었다. 

신입사원의 경력개발에 대한 것이었는데, 강의 때마다 동일하게 했었던 질문이 하나 있다.


"여러분들에게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포기하지 않을 그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을 잘 설명하는 한 단어가 있나요?"

 

막 대학을 졸업한 신입들에게는 좀 철학적이고 무거운 질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기억해 보면 자신 있게 손을 들고 그 자신의 생각을 대답했던 신입 사원은 여태껏 없었던 것 같다.  

실은 이 질문은 내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은 아니다. 이전에 어떤 분의 강의를 인터넷에서 보고 얻게 된 인생의 지혜였다. 그분도 녹화된 강의 속에서 수강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아마 내가 던진 질문에 당황했던 신입사원들처럼 나도 실은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었다.    

무엇인가 나름 목적의식이 있고 남들과 다르게 부지런하고 성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부터 그 질문을 계속해서 곱씹으며 자신에게 던졌다. 

당시 내 나이는 30대 중반을 넘었고 경력과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랐다고 자부하던 때였으며,

오퍼를 받고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을 결정해서 다니고 있던 곳을 정리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이제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내가 살아온 인생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 속에서 정말 바라는 그 하나는 무엇일까? 나를 나 답게 드러내고 나 다움을 설명해 주는 그것이 무엇일까?


신입사원 강의 시에 늘 보여 주었던 장표다.
기업에게 비전과 사명 그리고 핵심가치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전략이 있듯이 개인들에게도 꿈과 계획이 있어야 하고 나다움을, 자기다움을 설명해 주는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다움의 회복은 바로 나 자신의 가치관의 회복이다.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동사형'이어야 한다.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가치는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늘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을 광야로 불러내셨고, 대화를 나누셨다. 

그곳에서 그들에게 꿈을 꾸게 하셨고 해야 하는 사명을 알려 주셨다. 

그들에게 부여된 그 사명을 행할 때 그들은 가장 그들 다운 모습을 보였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자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등장하여 변이 되고 변종된 것들을 마치 오리지널인 것 양 말하며 사람들을 홀리기 시작했다. 현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목소리를 더 높이고 사람들을 모아서 정통적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골방으로 그리고 광야로 나아가 절대자, 하나님을 만나는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회개를 통해서만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광야로 나가야 하는 시간이다

한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조차 바이러스로 인해 기존과 단절된 전혀 다른 모습과 상황을 경험하며 모두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촘촘히 연결되어 있던 모든 항공편의 항로들이 어느새 하나둘씩 끊어지고 각 국가들이 국경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 세계화, 글로벌화가 가져온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빠른 시간 안에 치유하기 위한 비책이 바로 계획된 격리와 고립임을 알기 때문이다. 


개인들도 어쩌면 동일한 메시지를 받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저주받은 듯한 시간을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하는 기회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바이러스도 어쩌지 못하는 통신망과 디지털기기를 의도적인 '언택트' 상태로 만들고 자기다움의 회복을 위한 고독을 찾아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 끝에는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원했던 '정상'의 삶이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자기다움의 회복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한 연못에 연꽃잎 하나가 있었다. 

이 연꽃잎은 하나는 매일 다른 연꽃잎 하나로 분리 성장했다. 결국 이 연못은 30일이 지나자 연꽃잎으로 완전히 뒤덮였다. 이 연못의 딱 절반만이 연꽃잎으로 뒤덮인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대부분은 15일이 지났을 때쯤이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15일째에는 전체 연못의 0.003%만이 덮였을 뿐이다. 겨우 연못의 1%를 연꽃잎이 덮은 것은 무려 24일이 지난 시점에서였다. 

답은 29일째이다. 그리고, 마지막 30일째 전체 100%가 덮였다. 

Exponential Growth(기하급수적, 지수적 성장)을 설명할 때 쓰는 예화다. 

현재 바이러스의 확산 그래프와 거의 일치하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격리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바이러스가 그렇다면 반대로 선하고 긍정적인 것도 이와 같이 퍼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물론 바이러스만큼 전염력이 강해야겠지만)

소수의 자기다움의 회복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나의 자기다움 회복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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