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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경일 Oct 28. 2017

고경일의 풍경 내비

왜, 츠루하시(鶴橋)에 모였을까요?   

츠루하시(鶴橋:학다리, 오사카 이쿠노 구(生野區)의 조선인 밀집지역)에  를 처음 알게 건 1994년이었습니다. 아직 일본어가 많이 부족해 일본어 학원에서 기초부터 공부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매일 7시간의 아르바이트와 4시간의 일본어학교 수업, 숙소와 알바, 일어학교를 이어주는 것은 하루 2시간 정도 타는 자전거였습니다. 비싼 교통비를 아끼고자 타기 시작한 자전거였지만, 거리가 멀어 타면 탈수록 피로는 쌓여만 갔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삶에 대한 관심조차 허락할 수 없을 정도로 유학 초기의 삶은 불어 터진 가락국수처럼 피곤에 찌든 일상이었습니다.

1920년대부터 오사카시의 확장 개발로 이쿠노 구 등 낙후된 서부 지역에서 대규모 토목 공사가 전개되었습니다. 험한 노동 일에는 값싼 인건비의 조선인 이주 노동자들이 동원되었고, 당시부터 조선인 마을의 원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코리아 NGO센터의 활동가로부터 최근에 들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1913년 1월, 일제는 조선총독부 칙령 39호로 '역둔토 특별처분령(驛屯土特別處分令)’이라는 해괴한 법률을 만드는데, 이는 일본인의 조선 이주를 돕는다는 명목 아래 이루어진  조선침탈 법(?)입니다. 일본인은 무일푼인 일지라도 조선 땅에 건너오면 누구나 정착자금과 1인당 약 6,000평의 땅을 공짜로 주고 또 값싼 이자로 얼마든지 땅을 구입하여 지주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1918년에 이르면 일본인 지주는 급격히 증가하여 이들은 주로 곡창지대를 점령군처럼 접수해 갔습니다.  정작 토지의 주인이었던 조선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만주로 올라가거나, 부관 연락선을 타고 일본의 땅에 건너가 막노동판의 노동자로 떠돌게 된 것입니다. 1명의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오면 열 명의 조선인이 고향에서 쫓겨났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1945년 패전 이후, 강제연행으로 끌려온 여성들과 강제 징용 남성들은 일본 땅 여기저기에 방치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됩니다.

<무심하게 흐르는 히라노 강> 돼지를 기르는 들판이란 뜻으로 이카이노로 불리던 강인데, 장마철의 범람을 막고 군수품을 나르기 위해 대형 운하로 재건설되었다.



츠루하시는 전차 3개 노선의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JR선 , 긴 테츠 선 , 지하철까지 지나가는  오사카의 번화가 난바(難波)에서 가까운  곳으로 패전 이후에는 미군의 보급물자를 내다 파는 야미 이치(闇市:암시장)이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 하였지만 그 땅에서 건너온 조선인 동포들은 일본 땅에 닦아 놓은 터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받아야 할 월급과 돈으로 바꾸지 못한 군표와 연금과 가족이 있었습니다. 암시장에서 조선인들은 구 일본군 병 제창에서 훔쳐 온 철물을 내다 팔았고, 사채업을 통해 돈을 모았습니다. 막걸리를 담아서 수입을 올리고, 일본인들이 못 먹는다고 버린 소의 특수 부위들을 팔아 가족들이 먹고살았습니다. 츠루하시 역에 정차한  전차의 출입문만 열려도 밑에서 올라오는 불고기 연기에 지독한 냄새가 난다거나 마늘냄새가 진동한다고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한류 붐이 일면서 마늘과 김치와 불고기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이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쿠사이(臭い:냄새)는 금기였습니다. 야키니쿠(焼肉:고기구이)와 호르몬야키(ホルモン焼き:대창구이), 기무치(キムチ:김치)와 닌니쿠(にんにく:마늘)의 쿠사이는 재일 조선인을 평생 따라다니는 수식어였습니다. 전후에 태어난  일본인들과 젊은이들은 재일조선인이 왜 일 본 각지의 부락과 더러운 둑이나 슬럼가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종차별과 민족차별, 부락 차별은 분단된 나라, 이데올로기로 갈라진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 만으로 감내해야 하는 ‘재일 조선인’의 숙명처럼 강제되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의 부락은 ‘터부’로 여겨지고 있을 만큼 요주의 단어다. 이곳에 사는 부락민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노예나 다름없었고 인민이나 국민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습니다.

<인종차별 시위에 상처 받은 코리아 타운>무서운 것은 땅이 갈라지고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흔들고 뒤집는 ‘역사의 지진’은 반복된다는 것이다.



20대에 재일 조선인들의 고향인 츠루하시 한복판에 살면서도 자신의 팍팍한 삶만 원망하며 살았던 필자였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보통 일본 학생들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재일 조선인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게 해 준 오성원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한 유학생의 눈에 비친 일본 사회는 깨끗하고 편리하고 첨단의 기술이 가져온 선진국일 뿐이었습니다. 오성원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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