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학생의 치마저고리
멋있었다. 한복의 라인이 한옥의 처마와 같아서 단아하고, 우아하며 여성(?)스럽다고 배워온 필자에게 교토 시내버스에서 마주친 조선학교의 치마저고리의 학생은.
1996년의 쌀쌀한 가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토 시내버스를 탔는데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이 어깨에 맨 가방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교토 조고 김ㅇㅇ ‘ 익숙한 한글로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커다랗게 써 놓은 학생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몇몇 불량해 보이는 일본 남학생들이 치마저고리를 보며 짓궂게 수작을 부렸지만 , 그 소녀는 신경 안 쓰고 품위 있게 서 있을 뿐이었다. 두근거렸다. 일본인들 틈 사이에서 저렇게 당당하고 멋있게 서 있을 수 있게 한 '근원'은 무엇일까?
유학생 주위에는 두 부류의 재일조선인이 있었다. 김ㅇ순,류ㅇ철 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쓰면서 서투르지만 끝까지 우리말로 소통하려는 사람이 있다. 다른 부류로는 구니모토 야ㅇㅇㅇ , 도쿠야마 가ㅇㅇㅇ, 가네모토 사ㅇㅇㅇ 등과 같이 일본 이름과 우리말을 못하는 사람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일본인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은 부모세대가 자식들을 위해 일본인으로 귀화한 우리 동포라는 것을. 일본이 패전하고 50년이 지났지만 유학생들은 자유롭고 풍요로운 일본이라는 나라에 유학을 왔습니다만 묘한 공기를 읽을 수 있었다. (눈치가 빠르다는 일본식 표현) 유학생들 역시 두부류였다.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학교일에 함께하고 잘못된 일에는 단체행동으로 떳떳하게 문제 제기하는 학생들. 또 한 부류는 마치 일본인처럼 유학생들과는 말도 섞지 않고 일본 학생과 교수들과 어울려 일본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모든 사람들을 이렇게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없다. 당시의 분위기를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무리하게 이분법으로 나눈 점 이해해 주시길.)
우리 이름과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은 조선학교 출신들이었다. 조선학교라고 하면 막연하게 북한의 학교로만 알고 있던 필자의 무식함을 덜어 주신 분이 있다. 오성원 선생이다. 유학생들이 자주 가던 구레시마(呉島)라는 오코노미야키(お好み焼き:밀가루 반죽에 고기와 야채 등을 넣고 철판에서 구운 오사카의 대표 요리) 가게의 어머니(학생들은 주저 없이 그렇게 불렀습니다)의 남편이었던 교토 제2조선 초급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셨다. 가족들은 모두 한국 국적으로 바꾸었지만 정작 남한의 경상남도 출신인 오선생은 ‘조선’이라는 국적을 지키고 있었다. 조선학교에 대한 궁금증은 언제나 오성원이 꼬박꼬박 꼼꼼하게 답변을 주셨기에, 필자는 자주 어머니의 오꼬노미야키를 먹으며 퇴임을 앞둔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왜 조선학교가 알본 사회 안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해 주었다. “재일 조선인은 외국인 신분입니다. 일본 땅에 태어나도 세금을 내고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이 있어도 조선인은 외국인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해 자문하고 조선 민족으로서의 마음, 정신, 문화, 역사를 배우고 일본에서는 물론이요 해외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것이 조선 학교의 이념 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언젠가 조선학교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교장실의 벽면에는 북한의 독재자로 배운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바짝 긴장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었다."왜 저 독재자의 초상화를 걸어 두셨나요? “라고 묻자 오선생은 “일본 내에서 민족 교육이 어려웠을 무렵에 재일 조선인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입니다”라고 답했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 전국에는 조선 학교가 500여 개 이상 만들어졌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1910년대 중반부터 부산이나 제주도 등 한반도 남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최악의 허드렛일을 하기 위해 실려 온 것이다. 탄광에서 채탄, 토목 건설 공사, 철도 부설공사, 비행장 건설 등 지에서 일하면서 가족이 늘어나고 조선인들이 모여 동네를 이뤘다. 일본 내에 거주하게 된 조선사람들이지만 일본학교에서는 조선어를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한 지붕에서 사는 딸이나 아들이 일본어만 배우게 되니 가정의 평화나 소통조차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해방시기 일본 내 조선인은 약 200만 명. 대부분이 징용이나 건설현장, 전시 경제 수요에 이끌려 와서 이 사람들은 패전 이후 150만 명이 한반도로 돌아오게 된다. 일본 본토에 생활권을 쌓고 있던 약 55만 명의 조선인은 살고 있던 터전을 버리지 못하고 머물기를 선택했다. 대부분 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맞벌이를 했기에 우리말을 못하게 된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조선 학교가 각지에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학교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맥아더가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이행하는 최고의 책임자로 일본에 오자 ‘냉전의 풍파’가 불기 시작했다. 1948년 소련이 지원하는 사회주의 국가 북한이 더 이상 영향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독재자 이승만을 지원하고, 일본 내의 경찰과 공무원들을 대거 다시 채용하면서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얄타회담을 통해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38도 선을 마지노선으로 하고 남한만의 독자 정부를 지원한다. 조선 학교의 운영 모체였던 재일본 조선인 연맹은 북한 정부를 지지. 이에 GHQ(연합군 총 사령부)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 정부는 조총련을 강제 해산시키고 조선 학교 폐쇄를 지시를 한 것이다. 조선학교 건립은 제국주의 일본의 패전을 맞아 민주의의에 기반한 민족자결 운동이자 식민문화를 척결하려는 교육운동이었지만 미국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념 문제로 몰고 갔다. 이러한 미군의 정책은 수많은 통일운동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4.3 사건까지 이어지게 된다.
일본 정부의 공격적인 학교폐쇄정책 속에 남한 정부마저 지원은커녕 조선학교의 북한의 이념 교육장으로 폄하했다. 북한 정부는 재일 조선인의 민족 교육에 관심을 보이고 지원을 시작했지만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독재정권은 오히려 일본 정부에게 조선 학교 폐쇄를 요청하는 한편, 조선 학교의 민족 교육을 이념교육으로 적대시했다.
미즈노 오키•문 경수저 『 재일 조선인:역사와 현재 』(이와나미 신서, 2015년)에 따르면 북한은 1957년부터 교육 지원금 송금을 시작했다. 몇 년 전 일본인 납치사건이 불거져 나온 이후에도 지금까지 조선 학교 전체에 연간 약 1억 엔(한화 약 10억 원)의 원조금을 보내오고 있다고 한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일제 36년 강제 통치기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문제를 단돈 10억 엔에 팔아먹는 동안 북한에서는 60년이 넘도록 우리 학교(조선학교)를 살리기 위해 매년 지원을 해 온 것이다.
교토의 버스 안에서도 만난 품위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던 교토 조고의 학생이 입고 있던 치마저고리는 매년 보조금이 가져다준 품위와 당당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