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고
얼마 전, 패트릭 브링리의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었다 (원제는 "All the Beauty in the World: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and Me")
저자는 뉴요커 기자로 일하다 형을 잃은 뒤 삶의 방향을 바꾸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이 되었다. 그곳에서의 10년을 돌아보며 쓴 이 책은 경비원의 경험담이자, 방대한 미술관을 안내하는 에세이집기도 하다.
저자가 소개한 수많은 작품 중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이집트관에서 마주한 모형들이었다. 곡물 창고, 제빵소, 양조장 등 일상의 풍경을 정교하게 축소해 만든 인물상들은 빵을 굽고 술을 빚으며 지금도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평소 같으면 피라미드만 보고 무심히 지나쳤을 이 4천 년 전 유물 앞에서, 그날따라 저자가 묘사한 이 모형은 유난히 오래 내 마음을 붙잡았다.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수천 년 전에도 사람들은 정해진 자리에서 묵묵히 노동하며 살았다. 노동은 시대를 막론하고 고되고 지루했을 것이다. 그 안에서도 누가 더 수월한 일을 맡았는지, 누가 더 많은 짐을 졌는지 비교했을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편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을 수도 있다. 혹은 운명이라 여기며 자족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흥얼거리며 즐겁게 맡은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국 노동은 노동이다.
2층에서 일하던 이들은 1층보다 조금 더 나은 ‘뷰’를 본다고 해서 과연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감독관이 노동자들보다 형편이 더 나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지금 우리가 회사에서 겪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노동이 파라오와 왕을 위해 바쳐졌듯, 우리의 노동도 회사와 상사를 위해 소비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했지만, 동시에 옆자리 동료들이 한 배를 탄 동지처럼 느껴졌다. 작은 우월감이 사라지고, 묘한 동정심과 동료애가 스며들었다.
문득 상상해 본다. 만약 우리의 모습을 모형으로 빚어 남겨둔다면, 수천 년 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노동하고 있을까? 아니면 AI가 모든 업무를 대신해 더 이상 형상으로 남길 만한 모습조차 사라져 있을까? 고대 이집트 무덤 속 4천 년 된 작은 조각을 보며 이런 질문을 품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경험이었다.
책 속에서 저자 '패트릭 브링리'가 한 말이 떠오른다.
“A work of art tends to speak of things that are at once too large and too intimate to be summed up, and they speak of them by not speaking at all.”
예술 작품은 단번에 요약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내밀하다. 그래서 오히려 침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우리는 책으로는 배우지 못한 감각을, 한 점의 작품 앞에서는 깨닫게 될 때가 있다. 그래서 뮤지엄은 단순히 과거를 모아둔 공간이 아니다. 과거를 통해 지금의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내가 고대 수천 년 전 이집트의 빵 굽는 장면에서 오늘의 직장 풍경을 떠올리고, 곁의 동료들을 새삼 다르게 바라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읽는 순간 당장이라도 뮤지엄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특히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작품 원문 링크: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544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