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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지 Apr 15. 2021

백패킹의 시작

라오스, 루앙프라방 (정글투어)


20대 초반, 친구가 책을 한 권 선물해주었다.


“요즘 빠져있는 산티아고 순례길 책 중에 이 책이 그나마 괜찮은거 같아, 이 책을 네가 보면 좋아할 것 같아.”


책을 펼쳐 읽는 순간, 백패킹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차올랐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면서 과거의 나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불안한 미래의 나를 위한 도전의 글들이 ‘백패킹’에 대한 로망을 한가득 심어주었다. ‘백패킹’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그런 감정이 시들시들해지는 20대 후반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체코인 외국인 친구가 있었고 가끔 여행을 같이 떠나자고 콕콕 나를 찔렀다. 이번에도 신선한 여행을 제안해줬다.


“우리 라오스 갈래? 아빠가 추천해주신 곳이 있어!”


가족 여행을 자주 가던 친구는 아버지의 여행 스타일에 커다란 신뢰가 있었다.


“나 백패킹이 해보고 싶어..”


숨어있는 백패킹 욕구를 꺼내보았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이랄까?


“백패킹? 그거 별거 없어. 가자!”


그렇게 우리의 첫 백패킹이 시작되었다.





라오스 국민 민주공화국


주민의 대부분은 라오족이며 48개의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그 소수민족 중 크묵족이 살고 있는 마을에 가는 정글투어를 계획했다. 화이트엘리펀트투어라는 에이전시와 함께 하는 일정이었다. 가는 길은 오직 크묵족만이 알고 있고 정돈되지 않은 길을 가이드와 함께 걸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라오스에 도착한 첫 날, 우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늦은 밤에 도착했고 라오비어호 짧은 밤을 알차게 보냈다. 숙소에서 머물고 난 다음날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라오스의 비행기는 어딘가 불안하고 조그맣고 무서웠다. 불안하게 50분 정도를 버티며 루앙프라방에 도착한 우리는 정글투어를 예약한 에이전시를 찾으러 갔다. 그리고 에이전시 대표님은 나에게 한국사람이냐고 물어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사람들은 1박을 정글투어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 관광만 좋아하는 거 같다. 아마 너는 최초의 루앙프라방 정글투어를 시도한 한국인일거다.”


이런저런 이야길 들으며 한국사람들 이미지가 도대체 어땠길래 이런 이야길 하는지 괜히 기분이 나쁘다가도 최초의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이 꽤 마음에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거리의 ‘탁발’을 봤다.

주황색 천을 걸친 스님들이 계급장 순서대로 거리를 걸었다. 먹을거리를 담을 수 있는 바구니를 든 귀여운 어린 중들, 어디선가 들리는 종소리, 먹거리를 손수 준비해서 나누는 주민들의 미소는 경건하고 평화로웠다. 누군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의 소리를 묻는다면 난 이 도시의 아침 풍경을 말하고 싶다.


탁발을 구경하며 에이전시 담당자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갔고 아침으로 잎사귀로 싸인 sticky rice와 망고스틴을 주셨다. 뻥뚫린 트럭에 몸을 싣고 루앙프라방에서 1시간 30분 가량 차로 이동해야 하는 곳으로 떠났다.


아무도 없는 도로 한구석에 우릴 내려줬고 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거기서 나와 나이가 비슷할 법한 크묵족 가이드와 몽족 가이드를 만났다.  친절한 미소와 짧은 한국어로 유쾌한 장난을 치는 순수함이 사랑스러운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강을 건너기 위해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 나무배에 몸을 실으며 자연 속에 둥둥 뜨는 나의 마음을 밀며 정글투어를 시작했다.

왼쪽이 몽족 가이드, 오른쪽이 크묵인 가이드

목적지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는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따라 걸었다. 찐득찐득한 땀이 범벅이 된 채로 계속 걸었다. 그 와중에 만나는 처음 보는 나무들과 꼬여있는 나무뿌리들의 신기함을 즐기며 그늘에서 쉬어가기를 반복했다. 내 키보다 훨씬 큰 풀숲을 가이드가 낫으로 베어가며 길을 만들고 거친 풀에 다리를 뜯기며 천천히 걸어갔다. 우리밖에 없는 자연 속을 개척하는 느낌에 살짝 희열을 느꼈다.


몇 시간을 걷다 보니 우리는 커다란 대나무 숲에 도착했고

대나무를 베고 계시는 누군가의 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친 우리에게 지팡이를 만들어주며 미소 짓는 그 모습은 누구나 사랑에 빠질듯한 장면이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누군가의 기쁨을 환하게 맞이하는 순수한 친절함을 오랜만에 만났다.


빠르게 손질해서 만들어주신 대나무 막대를 트레킹 폴 삼아 땅에 몇 번 찍다 보니 작은 마을이 보였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족장이었던 마을이었는데, 족장 할머니의 지혜와 허락이 큰 권력인 마을이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집과 ‘SCHOOL’이라고 쓰여있지만 구멍이 숭숭 난 나무집과 맨발로 뛰어다니며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앵두나무에 올라 앵두를 따먹는 소녀와 나무로 엮은 공으로 족구를 하는 다양한 나이대의 소년들, 그리고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소녀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크묵인 가이드는 아이들 모두의 친구였다.


시골집에서 만날  같은 포근하고 고운 솜이불을 준비해줬다. (투어 비용이 그리 싸지 않았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눕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단잠을 잤다.

일어났더니 귀한 음식을 준비했다고 크묵인 친구가 빨리 오라고 했다. 식사장소로 가기 전, 부엌의 아궁이를 보았다. 뾰족한 나무 막대에 꽂혀 죽어있는 커다란 쥐를..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했다.


“저걸로 요리하진 않을 거야. 음식의 재료는 아닐 거야.”


몇 분 뒤, 우리의 저녁식사로 나뭇잎에 쌓인 Sticky rice와 죽순 국과 쥐 형태 그대로 태워져 양념에 발라져 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더 맛있게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점 두 점을 생각보다 맛있게 먹고, 짜디 짠 죽순 국을 들이켜니 배가 불렀다. 우리가 잘 먹지 못하자 가이드는 남은 쥐고기를 깨끗하게 발라먹었다. 귀한 음식이었다.


밥을 먹고 나온 우리는 아이들이 빤히 우릴 쳐다보고 기다리는 모습을 만났고  준비해뒀던 레고와 볼펜을 챙겨서 하나씩 나눠줬다. 아이들과 사진도 찍고 한국에서 유행하는 동영상 어플로 사진을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아이들에게 포즈 알려주기


그리고 가이드의 어머니는 마을에서 직접 빗은 증류주를 준비해주셨는데, 한잔 한잔 마실수록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많이 먹었는데도 다음날  쌩쌩해졌다.


그때 마신 술과 어두컴컴한 밤이 그립다.




나의 몇 년의 인생에서 굳이 산을 걷거나 산속의 낡은 집에서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별거 아닌 걷기는 내 일상속에 없었고 싫었다. 하지만 이 여행을 통해 걷기의 매력에 푹 빠졌다.


걸으면서 느끼는 순간순간의 기억과 생각은 거의 없기도 하고 금방 사라지고 나를 단순하게 만들어버린다랄까..?

 

어쩌면 기억하는 순간들이 작고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거대한 게 아닐까?  생각을 비울 때 우리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과 작은 것이라 불리는 것들의 거대함을 만나는 게 아닐까?


가끔 삶이 무섭고 힘들고  자신이 초라해질 , 배낭을 메고 걸어본다. 생각보다 가볍다가도 배낭은 금방 무거워진다. 어깨와 골반을 누르는 가방의 무게는 가방을 벗는 순간 해방감으로 잠시 잊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초보 백패커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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