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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민희 Nov 29. 2018

#8. 4F

을지로 같은 카페에서 을지로 같은 메뉴를 먹을 수 있다.

*겨울 막바지에 제작한 독립 출판물 '을지로 야옹이'를 매주 브런치에 소개합니다


#8. 4F



을지로 같은 카페에서
을지로 같은 메뉴를 먹을 수 있다.



방산시장 뒷편 으슥한 골목 안에는 오래된 인쇄소를 개조한 카페가 하나 있다. 
총 4층이라 이름도 4F. 



처음 갔던 때는 추운 겨울 저녁이었다. 
인쇄소였던 자리여서 그런지 주변에는 박스, 벽지, 봉투, 인쇄라고 적힌 간판의 상점이 많았다. 

다들 퇴근한 시간이라 컴컴했다. 
신문지 뭉치들이 찬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녀 스산했다. 


춥기도 추웠지만, 폐허 같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몸을 잔뜩 웅크리며 카페를 찾았다. 

야옹이들이 지나다닐 것 같은 작은 골목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4F였다! 



을지로는 늘 이렇다. 
낯선 골목을 긴장하며 걷게 만들고, 찾던 가게가 나오면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을 준다. 

을지로의 밀당 때문에 을지로 구석구석을 야옹이처럼 쏘다니는 것 같다.


여튼 4F로 다시 돌아와서. 
묵직한 철문에 난 창문 너머로 거대한 쇳덩이가 보였다. 

인쇄소에서 사용하던 인쇄기라고 한다. 


인쇄기 크기로 보나 인쇄소 규모로 보나 잘나가던 인쇄소임이 틀림없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인쇄소의 투박함을 살린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인쇄 골목에 있는 인쇄소를 개조한 카페라니. 

의미 있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갔다. 

메뉴도 남달랐다.



먼저 시그니처 메뉴인 ‘잉크밤’. 


도무송을 깔아 둔 테이블이 인상적이었던 4층에서의 잉크밤

살짝 얼린 에스프레소가 올라간 아포가토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에스프레소가 천천히 퍼지는 모양이 마치 어릴 적 했던 물에 잉크 퍼뜨리기 놀이 같아 묘했다.


맛은 보통의 아포가토 이상이었다. 
너무 맛있었다.
달콤한 걸 별로 안 좋아하는 나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인쇄소에서 썼던 것으로 보이는 널빤지를 재활용한 테이블에 싹싹 긁어먹어 깨끗해진 컵을 아무렇게나 놓으며 폭신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용두동에서 매운 주꾸미를 먹고 간 터라 얼얼했던 입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다음 주에는 광장시장에 있는 한 빈대떡집과 4F가 협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에도 광장시장 빈대떡을 정말 좋아하는데 카페와의 콜라보레이션이라니. 
아, 이런 거 너무 좋다. 
퇴근 후 바로 4F로 갔다. 


첫 빈대떡 손님이라며 주문받던 분은 우왕좌왕. 
우리가 처음이라니 더 좋잖아! 

술 없이 먹는 빈대떡은 있을 수 없지. 
보드카도 함께 주문했다.


잉크밤을 먹었을 때 빼고는 매번 보드카를 시켰다! 찐하게 타주세요!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노닥거리다 보니 아래층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한 15분 정도 지났을까. 
은박지가 씌워진 일회용 접시가 아닌, 시크한 검은색 접시에 나온 빈대떡은 내가 알던 광장시장 빈대떡이 아니었다. 


이게 어딜 봐서 광장시장의 빈대떡 비주얼인가.


미국에 이민 간 소꿉친구의 근황을 우연히 SNS에서 발견했을 때 같은 느낌이랄까. 

이 빈대떡은 뽀얀 모짜렐라 치즈 옷을 입었고 파슬리 가루와 외국 맛 나는 소스로 한껏 치장했다. 
옆에는 양파 장아찌가 아닌 올리브 절임이 함께 나왔다. 
나무젓가락 대신 포크와 나이프도 준비되어있었다. 




비주얼이 어쨌든 4F의 빈대떡이나 광장시장의 빈대떡이나 모두 먹음직스럽게 생겼긴 건 매한가지. 
그리고 둘 다 실제로 맛있었다. 

광장시장에서 먹은 것처럼 갓 부쳐내 바삭한 식감이나 북적이는 분위기는 없었지만, 잘 차려진 요리를 대접받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보드카까지 곁들이니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았다. 



‘상생’이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곳이 많아서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 빈대떡은 상생이 뭔지 잘 보여주는 메뉴란 생각이 들었다. 



요새 잡음이 끊이질 않는 익선동이 떠올랐다. 

초기의 익선동 상점들은 ‘어지럽고 바쁜 서울 속 조용하고 자그만 한옥 골목’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이 있었다.
그래서 순식간에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던 거고. 


지금의 익선동은 그냥 상점 밀집 지역 같다. 
아쉽다. 




“거기 좀 복잡한데…”

익선동을 사랑했던 나도 누군가 익선동엘 가고 싶다고 하면 조금 망설여진다.


야옹이처럼 누비면서 느낀 건데, 을지로에는 아직 을지로스러움을 유지한 가게가 많은 것 같다. 
많은 가게가 을지로스러움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더 열심히 ‘을지로 뿌수기’를 할 수 있길 바라본다.




4F

서울 중구 을지로35길 26-1
글로 설명할 수 없어서 주소를 남긴다
골목이 종종 트럭으로 가려져 있어 놓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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