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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민희 Oct 18. 2019

돈 있는 백수의 맛

5/23 IPA 97(Silver Moon Brewing)

포틀랜드에 가기로 결심한 두 번째 이유는 후드산(Mt. Hood)이었다. 도심에서 한두 시간만 벗어나면 만날 수 있다는 후드산 사진을 보고 홀딱 반했다. 포틀랜드에 뭣하러 가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많이 보여준 것도 후드산 사진이었다.

장롱 면허는 커녕 무면허인 내가 후드산을 보러 갈 수 있었던 것은 밴쿠버에서 운전 실력을 갈고닦은 유진 덕분이었다. 나의 버킷리스트였던 후드산 보며 맥주 마시기와 유진의 버킷리스트였던 (남자친구와)카약 타기를 실현하기 위해 트릴리움 호수(Trillium Lake)로 갔다. 슬프게도 유진은 반쪽짜리 버킷리스트였지만, 기꺼이 운전대를 잡았다.

카약에 맥주 거치대가 마련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야심차게 맥주를 사뒀는데 두고 나왔다. 맙소사. 혹시나 해서 구글맵을 뒤적이니 마침 호수 근처에 리쿠어숍이 있었다! 카약에도 맥주 거치대가 있고, 산속에서도 맥주를 살 수 있는 Brewvana 포틀랜드 사랑해!


깊은 산 속 옹달샘을 발견한 토끼의 심정이랄까

역시나 너무 많은 맥주가 있었기에 고르기 쉽지 않았다. 며칠간 페일 에일과 IPA만 마셨던 터라 깔끔하고 시원한 라거가 당겼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내 모습이었다. 청개구리 같은 나란 사람.

LAGER 단어를 쭉 찾다가 영롱한 녹색 캔이 눈에 들어왔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아래 대왕 홉을 싣고 있는 캠핑카 한 대가 그려져 있었고, 배경으로는 오로라로 추정되는 녹색 빛이 깔려 있었다. 비록 후드산을 바라보며 캠핑을 할 순 없지만, 이 맥주를 마시면 그런 기분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IPA이면 어때. 그냥 이 맥주 여섯 캔 묶음을 집어 들었다.


후드산 보면서 맥주 마시기 미션 성공

사실 이 맥주의 맛은 기억이 잘 안 난다. 맛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트릴리움 호수 한가운데서 이 맥주를 마셨던 분위기와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부럽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쬈지만, 차가운 바람 덕에 하나도 덥지 않았다. 이불 덮고 에어컨 튼 것처럼 기분 좋은 온도였다. 넘실대는 호숫물을 따라 내 마음도 같은 방향으로 넘실댔다. 고개를 돌리면 후드산이 보였고, 손에는 맥주가 쥐어져 있었다. 미국판 신선놀음이었다.



열심히 운전해준 나의 조력자

카약은 두 시간짜리 코스였다. 타기 전에는 두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맥주도 딱 한 캔만 가져가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신선놀음은 두 시간도 모자랐고, 맥주 한 캔은 너무 아쉬웠다.


여기서 더 놀고 싶다!


노를 이용해 물을 살짝 떠봤는데 노란색이라 충격이었다

그 후 포틀랜드에서 출렁이는 호숫결을 다시 만날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거의 매일 신선이 된 것 마냥 하루를 보냈다. 여름의 포틀랜드는 트릴리움 호수에서처럼 따가운 햇빛과 차가운 바람의 환상적인 조합을 선보였는데, 매일 이 날씨를 만끽하면서 맛있는 맥주를 마셨으니 말이다.
한량처럼 날씨와 맥주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호수에서 카약을 탄 것처럼 기분도 출렁였다.


아, 이것이 돈 있는 백수의 맛이구나.
현실은 반대지만 살짝이나마 그 맛을 본다.



5월 23일에 마신 맥주 기록

IPA 97

SLVER MOON Brewing / IPA-American / 7%
IPA였는데 후드산을 안주 삼아 마시니까 행복해! 사실 계속 IPA랑 페일 에일 마셔서 라거가 당겼는데 진짜 시원하고 너무 좋았다. 향이나 맛은 기억 안 나고 그 분위기만 기억난다.



POK POK Pils

Dirty Pretty / Pilsner
시원한 필스너! 탄산이 세고 향이 적다. 적당히 씁쓸. 한참 걸어온 보상인 거 같아서 좋았다.



ROGUE 샘플러
- 6 HOP IPA(American IPA, 6.66%) : 맛있는 IPA. 다른 홉들 섞인 것도 궁금하지만ㅋ 적당히 찐하고 맛나다. 향은 적은 듯
- Batsquatch(NewEngland IPA, 6.7%) : 마시자마자 귤 껍데기 맛이 난다고 말했다 ㅋㅋ 약간 새콤쓰
- Yellow snow pilsner(pilsner, 5.5%) : 낮에 먹은 라벤더 꿀 맛이 난다. 덜 쓰고 향긋. 신기
- Hazelnut Brown Nectar(BrownALe, 5.6%) : 엄마 차에서 나던 향. 핵노맛 ㅎㅎ 헤이즐넛은 가짜 향이라 싫어한다.


(+)

맥주는 아니지만, 우연히 들른 Mt Hood Winery.

예쁜 로제 와인을 후드산을 보며(자세히 보면 사진에서도 보인다..) 마시니 여기 또한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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