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민희 Sep 18. 2019

예쁜 쓰레기는 싫지만 이건 꼭 사야 돼!

5/22 Ecliptic Brewing

포틀랜드에 갈 준비를 하면서 수도 없이 봤던 말이 있다. 포틀랜드에는 개성 넘치는 마이크로 브루어리가 많다는 것. 실제로 가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별표한 양조장과 맛집들. 아, 행복했었다.

매일 밤 내일은 어떤 양조장(들)에 갈지 정했고, 그 양조장을 기준으로 가까운 카페와 상점들을 갈 계획을 세웠다. 매일매일 새로운 양조장을 가도 아직 가볼 양조장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사실에 밤마다 이불을 꼭 쥐며 잠들었다.


포틀랜드에 있는 동안 이틀에 한 번은 마트를 갔는데,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 또한 맥주 코너였다. 포틀랜드를 비롯해 오리건주에서 만들어지는 로컬 맥주들이 서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하는 통에 매일 맥주 사재기를 했다.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조장 뿌수기’를 실천했다.


맥주 덕후에게 포틀랜드는

확실히 천국이다.


마트 맥주 코너. ~HEAVEN~


매일 다른 양조장에 가고 있다니까 친구들이 정말 맥주 맛이 다 다르냐고, 그 맛을 구분할 수 있냐고 물었다. <요리왕 비룡>에 나오는 심사위원들처럼 뛰어난 미각을 갖고 있지는 않아서 섬세하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맛이 다 다른 건 확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 미천한 미각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열심히 맥주 노트를 쓰고 있다며 슬쩍 보여줬다.


살짝 취한 상태에서 쓰면 더 솔직한 맛 표현이 가능하다.


오늘의 양조장은 Ecliptic Brewing.

보자마자 여기는 꼭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포틀랜드의 어떤 브루어리보다 그들만의 독특한 콘셉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cliptic Brewing의 귀여운 메뉴판

이름에서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 Ecliptic Brewing의 모든 맥주는 우주와 관련되어 있다. 맥주에 별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인공위성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도 한다. 심지어 샘플러 트레이도 행성의 궤도와 닮았다. 검은색 칠판 메뉴판의 알록달록한 맥주 이름들도 우주 속 이름 모를 별처럼 반짝였다.


마트 맥주 코너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맥주 또한 이 Ecliptic Brewing의 맥주였다. 화려한 캔 디자인을 보면 왠지 우주가 담겨있을 것만 같다.

Ecliptic Brewing의 캔맥주들

한국 돌아올 때 맥덕 친구들을 위한 선물로 사 오기도 했는데, 우주 같은 캔을 보고 맥덕 친구들도 별빛 같은 눈망울로 화답했다. (왕 뿌듯)



오른쪽이 내가 고심 끝에 고른 맥주들이다

여섯 가지 맥주를 고를 수 있는 샘플러 트레이를 주문했다. 우주 관련 단어들이 얼마나 예쁜지 감탄하머 메뉴판의 설명을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주문하고 나서도 내가 고른 맥주들이 어떤 맛을 낼지 상상하느라 기다리는 내내 설렘이 가시지 않았다. 여기 양조장 주인은 분명 우주 덕후일 거다. 세상의 모든 덕후는 옳다.



행성 같은 맥주들

결론 먼저 말하자면 맥주 맛은 별로였다. 예쁘고 화려한 버섯은 역시 독버섯인가보다. 맥주의 대부분은 매우 실험적인 맛이었다. 백종원 아저씨가 TV에 나와서 종종 말하던 ‘맛의 마름모’가 생각났다. 본인은 요리를 잘하는 게 아니라 맛의 마름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인 대중이 좋아하는 맛을 내는 거라고. Ecliptic Brewing의 맥주들은 분명 마름모 위 혹은 아래의 뾰족한 부분 어드매의 마니아를 위한 맥주 같다. 대중의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런 맛도 있어야 맛의 마름모도 마름모꼴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브루어리에 대한 기대가 컸던 터라 괜히 Ecliptic Brewing 맥주들에 ‘예쁜 쓰레기’라며 심술을 부렸다.


예쁜 쓰레기를 파는 곳 답게 분위기도 너무 좋았다

물건을 잘 안 사지만, 사도 꼭 필요한 것만 사는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걸로 다 한 거다.’ 안 된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제 할 일은 해야 한다.(예쁜 쓰레기를 안 모으면 돈은 어디에 다 쓰냐고? 먹고 마시는 데에 쓴다.) 그런 의미에서 보기에만 좋은 떡인 Ecliptic Brewing의 맥주들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우습게도 포틀랜드 양조장 도장깨기 하는 동안 유일하게 이 브루어리에서만 맥주잔 굿즈를 샀다. 정말 예뻐서 안 살 수가 없었다. 음, 마침 집에 맥주컵이 부족했던 것 같다.


물병 마저도 예뻤다. 사오고 싶었으나 이건 정말 쓸 일 없기에 내려놓았다. 이런 물병을 어디에 쓴담!



+) 포틀랜드를 떠날 때가 되자 손에 잡히는 물건을 너무 안 산 거 같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의무감에 맥주잔 몇 개를 더 샀는데, Ecliptic Brewing의 맥주잔이 가장 예뻤다.



++) VEGA IPA #1과 VEGA IPA #2라는 맥주가 나란히 있길래 비교해보고 싶어서 주문했는데, VEGA IPA #1이 훨씬 맛있었다. 두 맥주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가끔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말들을 만들어 냈는지 궁금하다.




5월 22일에 마신 맥주 기록


@Pine State Biscuits

PALLETJACK IPA

Barley Brown’s Beer / IPA-American / 7.2%


원래는 Ecliptic Brewing의 맥주 시켰는데, 다 떨어졌다고 비슷한 맥주 추천해줬다. 이것도 맛있다면서(귀엽). 맛이 덜 세서 비스킷이랑 해시브라운이랑 잘 어울렸다. 스무디 잔에 줘서 귀여웠다.



Ecliptic Brewing Custom 6
나이키 아울렛 구경을 마치고 오전에 못 먹었던 Ecliptic Brewing 맥주가 생각나서 걸어갔다.


- ORBITER IPA : 2018 World Beer Cup Bronze 받았단다. 이런 건 또 시켜줘야지. 너무 더운 상태이기도 했고, 메뉴판 1번에 써져 있어서 주문했다. IPA치고는 쓴맛이 라이트하다. 라거보다는 훨씬 쓰지만.
- Phaser Hazy IPA : 보리 맛이 많이 나서 별로.
- STAR PARTY BRUT IPA with LEMON&LAVENDER : 시다. 화장품 향이 나는데 라벤더 때문인 거 같다.
- VEGA IPA #1 : CASHMERE&STRATA HOPS
- VEGA IPA #2 : IDAHO GEM, BARBE ROUGE&PEKKO HOPS
- 같은 베가인데 #2가 더 보리 맛이 났다. 가장 밝은 별이라는 VEGA처럼 둘 다 밝고 빛났다.
- FLAMINGO PLANET GUAVA BLONDE ALE : 구아바 이상해 ㅋㅋㅋㅋㅋㅋ 더워서 시원하게 먹으려고 블론드 에일 시켰는데 너무 맛없어서 ....ㅎㅎ
- ORANGE GIANT BARLEYWINE ALE : 너무 쓰고 진짜 술맛이다 ㅋㅋㅋㅋㅋ 달고나 맛도 나는데(오렌지 맛 날 줄 알았는데) 쓰다 써. 쓰고, 또 쓰다. 12.5%에 IBU도 80이나 되고 ㅋㅋㅋㅋ

@Afuri Ramen

SAPPORO

Sapporo Breweries / Lager-Japanese Rice /3.2%

유자라멘 먹으러 갔다가 시킨 맥주 삿포로 생맥주. 포틀랜드 맥주는 안 팔아서 어쩔 수 없이 시켰다. 너무 평범해서 별 감흥 없었다! 후후후

Breakeside IPA

Breakside Brewery / IPA-American / 6.2%


전날 브루어리에서 사 온 맥주. 매가 그려져 있다. 부두 도넛(거의 버렸지만 ㅎ)을 안주 삼아 감자칩과 먹었다. 기억에 남는 맛은 아니었다. 무난쓰.



매거진의 이전글 강아지와 아기, 그리고 포틀랜드 맥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