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otional Gentrification
모처럼 주어진 일이 없는 토요일이었다.
일요일 가족 초청을 앞두고 내 선에서 가능한 음식을 대접해보기로 결심했다.
토요일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남편은 몸이 힘들 것 같다며 가족 방문시 늘 대접했던 스테이크 구이를 포기했다. 식당 가서 먹자는 말에 어린 아이들도 있고 하니 그냥 집에서 편하게 먹자고 제안했다. 나는 돼지 등갈비 구이를 준비했지만, 토요일 오후가 되자 남편은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토요일 오전부터 붐비는 코스트코에 가서 이것저것 사서 돌아온 직후였다. 홀로 번거로움을 자처한 나에게 응원을 보내기는커녕 고기 종류를 가지고 섭섭해 하는 말투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음식을 준비하는 내내 스트레스가 쌓였다.
45세가 되어 내 감정에 대해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무언가 언짢은 일이 생겼을 때 감정 전체를 뒤흔드는 트리거(trigger)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단지 소통에 잠깐의 오해가 생겼을 뿐인데 인생 전체를 뒤돌아보며 묵혀 있던 상처를 재평가한다. 짧은 통화에 갑자기 미국에 왜 왔나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냐, 이건 끝난 대화고 더 이상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거야. 마음을 다스리고 해야 할 일을 하자며 호흡을 고른다. 몇 번의 생각 끊는 훈련과 지인들의 조언이 도움이 되었다. 기억도 못할 순간의 일은 순간의 일. 확대 해석을 하거나 과잉 추측을 할 필요가 없다.
문득 친구가 추천해준 명상 링크가 생각나서 별생각 없이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도 앱을 이용해 5분, 10분, 길어야 15분으로 효율적으로 하는 나에게 20분이 넘어가는 유튜브 러닝타임은 꽤 부담스러웠지만 일단 시도해 보기로 했다. 틱낫한 스님의 명상 입문같은 영상이었고 초반에는 울림이 깊은 종소리가 반복되었다. 이거 하세요, 저거 하세요 요구하는 명상앱과는 사뭇 다른 상황에 당황했지만 종소리에 기분이 가라앉아 계속 자세를 유지했다.
명상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명상을 하며 안정을 되찾으니 요근래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왜 이리 여러 감정들이 부대끼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스님은 호흡법 외에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내 머릿속 목소리는 조목조목 무엇이 문제인지 짚어주고 있었다.
문제의 근원은 일종의 나이 탓이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종류의 감정들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 이리저리 뒤엉켜있고 외부 충격이 생길 때마다 이 뒤엉킨 감정들이 쿵 흔들린다. 예전에는 감정의 표출이 좀 더 단순했던 것 같다. 슬프면 울고 즐거우면 웃었다. 이제는 예를 들면, 슬프면서 안타깝고 불안하면서 걱정이 된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상황들을 꾸역꾸역 마주하게 되면서 어떤 감정의 패를 내놔야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뒤엉킨 감정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복잡하게 뒤엉킨다. 무엇이든 엉켜 버리면 푸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고 20분의 명상은 그 감정을 정리하게 만들었다.
일요일 가족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늦게 까지 일을 하고 돌아온 남편이 조금이라고 편하길 바랐다. 멀리서 온 친척과 아이들이 있어 식당보다는 집이 훨씬 대화하기 편할 터였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빠졌다. 나는 이 일을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는가? 시간이 괜찮으므로 배려 차원이라고 나선 일에 생각지 못한 요구가 들어오자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그러니까 왜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해서 이렇게 스스로 고통을 줄까?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목적한 대로 시행을 했고 나는 의도한 성과를 거뒀음을 인정한다. 완벽한 맛은 아니어도 손님 맞을 준비는 되었고 모두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사람들과 편하게 집에 앉아 신나게 대화를 하고 싶다. 그런데 왜 화가 나? 그런데 왜 불안해?
순간적으로 치고 올라왔던 감정을 20분 동안 분석하고 나니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장을 보고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하고 요리를 끝낸 나에 대한 뿌듯함이 더 커졌다.
화가 날 때마다 20분씩 그 감정의 정체를 밝히는 여유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의 이 사소한 경험을 통해서 나는 감정을 재개발해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것을 느꼈다. 기존에 반응했던 식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게 힘들어진 나이가 되었다. 감정을 모르니 그 답답함과 거슬림에 자꾸 화가 나게 되고 이는 자칫하면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잠깐의 충돌로 내 인생 전체를 후회하고 괴로워하며 살 순 없다.
지난 한 달 간 내키지 않지만 관성적으로 수락했던 일에 대한 스트레스도 감정 재개발을 부추겼다. 일을 하는 내내 화나고 불안하고 불행했다. 어서 끝나기 만을 빌며 꾸역꾸역 일을 완수했다. 예전 같으면 일을 준 상대방을 탓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생존의 위협이 느껴져서 대체 무엇에 화가 나는지 깊이 생각해봤다. 그 화의 근원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문제임을 알게 되었고 이 기회에 이 악순환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자동차 사고가 충돌의 흔적을 남기듯 감정 충돌도 상처를 남긴다. 그럴 때마다 방어벽을 올리고 나만의 방으로 퇴행할 수는 없다. 20-30대면 몰라도 감정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나이대가 되면 해결 방법 모색이 가능하다. 나의 경우는 감정 재개발이다. 이런 상황에는 이런 감정으로 대처하던 습관을 뒤집어 엎는다. 미니멀리즘 건축으로 감정을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이 추상적인 접근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실질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안하고 미칠 것 같고 초조하고 누군가가 밉고 당황스러울 때, 숨을 한 번 고르며, '꼭 이렇게 느낄 필요가 있을까' 자문하는 여유는 가질 예정이다. 감정 재개발이 될지 감정 해방이 될지 일단 시도나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