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마지막 10km
우리는 마지막 10km를 위해 살아가고 준비한다.
1.
순간 다리에 힘이 팍, 풀린다.
다리뿐 아니라 온몸, 특히 심장과 머리까지 팍 풀리는 느낌이다.
쉽게 말해 그 순간 나는 정신 줄 놓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순간부터 한 시간 넘게 그 상태로 지속되었다.
주위를 살핀다. 어디 누울 곳. 쉬어갈 곳. 찾는다.
여기가 내가 주로 뛰는 공원, 트랙, 천변이라면 나만의 쉼터가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화장실에 들어 볼일도 볼 수 있다. 자판기를 찾아 이온음료로 몸을 충전할 수 있다. 앉거나 누워 체력을 다시 충전할 수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이곳은 전혀 없다. 마라톤 코스이기에 당연히 길을 막고, 뻥 뚫린 도로, 즉 달리는 길만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 내가 뛰어가는지, 걸어가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만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나갈 수밖에 없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42.195 그것밖에 없다.
내 눈에는 롯데월드가 보인다.
100층보다 더 높은 건물도 함께 보인다.
인도에 소리를 지르며 응원 함성도 함께 들린다.
여기가 30km 조금 넘어간 어디 즈음이고, 아직 10km 이상이 남았고 나는 최소 1시간 이상 더 뛰어야 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머리에 이상한 계산을 한다. 10km를 만약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70분에 가능할지? 80분에 가능할지를 통밥을 굴린다. 거리를 가지고 내 마음속으로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닐까?
고통스럽고, 타협, 고난, 무념무상, 혼란,
그러나 마지막은 다행히 기쁨으로 끝난 경첩의사 첫 풀코스 마라톤 2024 JTBC 마라톤 기억이다.
2.
역시나, 역시나... 마지막 10km
악몽이었다.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 숫자가 너무 안 보인다. 38즈음 숫자가 보여야 하는데 아직 34밖에 안 되나 디? 좌절이다. 점점 기온이 올라가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뭔 11월 기온이 20도가 넘어간단 말인가? 억울하다. 이런 20도 넘어가는 날씨에 마라톤 한다는 나 자신이. 나는 10도 초반 날씨를 간절히 원하였는데. 마지막으로 갈수록 급수대, 스펀지 모두 없다. 왜 없는 것인지? 주최 측이 원망이다. 이 많은 인원이 참가하는지 알았다면 더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만 오천 명 러너이기에 충분히, 1.2번을 먹을 수 있다는 계산으로 각각 2만 개의 컵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아마 35인가 37인가 빈 콜라병들을 본 순간이다. 달리는 중간에 절대 콜라를 먹지 말라는 사람도 있으나, 그래도 시원함과 동시에 탄수화물을 함께 공급하는 콜라는 마라톤 마지막 순간에 절대적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빈 컵, 빈 콜 페트병만 보고 입맛만 다셨다. 보는 순간 더 갈증과 에너지 고갈만 느껴졌다. 그 괴로움으로 발을 더 무거워졌고 나는 러너가 아니라 어느 걷기 행사에 나온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잠시 이를 꽉 물고 다시 달렸다. 속도는 안 나지만 그래도 조금씩 뛰려고 나간다. 왜냐면 나는 러너, 풀코스를 뛰러 온 사람이기에. 그렇게 뛰다가도 잠시, 너무 내리쬐는 햇볕, 그리고 내 몸에서 흐르는 땀, 그리고 시계에 보이는 심박동수가 170을 훌쩍 넘어 180으로 가는 순간 다시 다리를 멈추었다. 기록, 시간도 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심장이 더 중요하기에, 멈추었다. 그래도 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핑계일 뿐이다.
준비 부족이다.
경첩의사가 자신이 준비 부족으로 첫 풀코스 도전한 결과이다.
LSD라고 하는 장거리 러닝을 딱 30, 32km 두 번 한 결과이다.
내 몸은 그것에 적응, 딱 거기까지 몸, 특히 근육이 세팅된 것이다.
남은 것은 정신력 뿐이다.
골인 지점을 상상하고, 완주메달을 받는 그 순간만을 생각한다.
저 멀리 골인 지점이 보인다.
나를 위한 골인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모두가 나의 첫 풀코스를 위해 응원해 주기 위하여 저기 골인 지점에서 기다려주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악몽은 끝이다.
완주 ( 정확히는 풀코스를 끝까지 들어온 것. )를 마치고 행복함만 누리면 된다. 다리, 온몸이 뻐근한 것은 잠시다. 행복함과 뿌듯함이 온몸으로 소스라친다.
3.
마라톤을 인생이라고 한다.
인생.
나는 지금 인생 전반전을 살아가고 있다.
전반 30분 즈음이라고 생각한다. 35분인가? 40분?
마라톤 마지막 10km 도 인생이다.
인생도 그렇게 흘러간다.
날씨도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원망으로 끝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내버려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준비도 부족한 것도 모르고 날씨, 그깟 기온 몇도 올라갔다고 원망하면 그것은 한참 부족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어디 있을까?
세상은 다 그런 것이겠지.
우리는 마지막 10km를 위해 살아가고 준비한다.
준비되지 않은 마지막 10km.
준비가 부족한 마지막 10km는 역시 힘들고 괴롭다.
반대로 충분한 준비, 미리 내가 준비 가능한, 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준비하고 시작하는 마라톤은 즐거운 레이스와 마무리가 된다.
다시 마라톤을 준비한다.
기분 좋은 풀코스 레이스를 준비한다.
LSD 35km, 37km를 한다.
가능하면 LSD로 풀코스 거리에 최대한 가깝게 해본다.
천천히 40km를 다섯 시간이든 여섯 시간이든 해본다.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
시간과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이미 나에게 여러 곳이 있다.
체중을 줄인다.
지금보다 딱 3kg만 줄이면 훨씬 속도도 올라가고 후반부에 처지고 괴로움도 줄어들 것이다. 체중을 줄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탄수화물 적게 먹고 더 움직이면 된다. 이미 알고 있고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달리기, 러닝 마일리지 쌓기이다.
마일리지만큼 결과가 가져오는 것이 마라톤이다.
지난 몇 개월간 나는 딱 월 120km 마일리지 러너이다. 시간을 더 만들어 월 200km 러너로 다음 풀코스를 준비하자. 물론 갑작스럽게 거리를 늘리는 것은 자칫 부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150km로 늘리고 그다음 200km로 가는 것이다.
산술적으로 200km라면 하루 평균 7km, 한 달에 15일 러닝 한다고 가정하면 한 번에 15km라면 충분한 거리다. 물론 너무 숫자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절대 무리하는 러닝은 안된다.
우리는 마지막 10km를 위해 살아가고 준비한다.
마지막 러닝이 편하고 즐겁다면, 그 중간 과정인 초반 10km, 중반 20, 30km까지 가는 과정도 즐겁고 지치지 않고 재미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뭐든 '할 수 있는데 안 해봤잖아!' 가 맞다.
할 수 있으면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