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어머니에게 말하다. " 아들이 백혈병... "
1.
어제 말하지 못했다.
오늘은 꼭 말해야 한다. 어제부터 여러 번 혼자서 말하기 연습하였다.
"어머님. 청년은 수술한 지 4~5일 되었고 잘 회복하고 있습니다.
처음 상태는 뱃속에 피도 많이 났고 안 좋았지만 잘 회복하고 있습니다.
복부, 배 수술한 것은 지금처럼 잘 치료하면 좋아질 것입니다."
"...... 중간중간 혈액검사를 했는데 사실은 안 좋은 수치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또 고민한다.
'안 좋은 수치'라로 돌려서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백혈구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가 있어 백혈병이 많이 의심됩니다'라고 정확히 말해야 하는지?
어제도 이 부분에서 고민고민을 계속하였다.
어제 회진 중 말하려다가 청년과 어머니가 이제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다정히 손잡고 걷는 모습에 차마 말하지 못하였다. 며칠 전 아들 사고 소식에 밤늦게, 새벽에 달려온 어머니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두렵고 무서워하며 아들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어느 누구든 그런 상황이면 다들 그렇게 될 것이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한시름 덜었다는 청년 어머니, 그리고 청년에게 너무 안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가혹하다. 그 말을 전해야 하는 나 자신도 힘들다. 하지만 꼭 말해야 한다. 손을 꼭 잡고 가는 두 모자를 보고 오늘은 말하지 못하겠다고 돌아섰다. 내일은 청년과 어머니가 떨어져 있을 상황, 어머니에게만 조심스럽게 말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래서 내일이 바로 오늘이다.
말해야 한다.
나는 청년 어머니에게 환자 상태 설명, 오늘 찍은 X-ray, 첫날 CT 사진을 보여주겠다면 저 멀리 떨어진 모니터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둘이 앉아 모니터에 보니는 X-ray 사진을 바라보면 태연하게 청년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청년 어머니는 이미 아들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매일 보기에 알고 있다. 오늘은 물도 마시고 죽도 먹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살짝 어금니를 한번 깨물고, 어제부터 여러 번 연습한 대로 모니터에 혈액검사, 백혈구 수치가 보이는 화면을 띄운다. 미리 혈액종양내과 선생님과 상의한 것도 한 번 더 되새겨본다.
"청년 혈액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있습니다.
백혈구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백혈병이 의심됩니다."
"백혈병이 의심됩니다"
나도 모르게 '백혈병'이란 단어를 두 번 말해버렸다.
동시에 청년 어머니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아직 20대 초반인 아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다.
2.
늦은 밤. 20대 청년이 교통사고 운전자로 병원에 왔다.
119에서 처음 연락부터 심한 복통과 저혈압을 말하는 순간, 나는 그날 밤 수술을 머릿속에 그려보기 시작하였다. 역시나 청년이 응급실 문을 통해 들어오면서 배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떨어지는 혈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였다.
심한 복강 내 출혈, 여러 장기 손상이 있었으나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미리 전화로 설명을 하였지만 멀리 있는 청년 보호자는 수술이 마무리될 즈음에 병원에 도착하였다.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여러 관, 피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아들을 보고 청년 어머니는 놀람과 동시에 눈물을 글썽였다. 수술 전에 급한 상황이기에 전화로 보호자에게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수술에 들어갔다. 하지만 전화 말미에 '최선을 다해 치료, 수술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 새벽. 나도 청년도 그리고 청년 어머니도 모두 밤을 새웠다.
살리기 위해, 살기 위해, 그리고 아들이 살아남을 위해.
3.
'백혈병'이란 단어를 청년 어머니에게 말한 다음날.
청년 어머니는 더 다정하고, 밝게 웃으며 청년과 병동을 걷고 있었다. 나에게도 더 밝은 모습으로 인사하였다. 수술 후 회복 과정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이제 내가 청년을 위해 치료할 것은 며칠 남지 않았다. 소독하는 일, 배에 달린 몇 개의 배액관을 제거하면 퇴원도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 더 해야 한 일이 남았다. 바로 청년에게 '백혈병'이라는 세 단어를 말해주는 것이다.
또 하루가 지나, 나는 청년 어머니와 한 번 더 둘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다르게 청년에게 '백혈병' 단어를 어떻게 전달, 말하는 것을 상의하였다.
결론은 내가 다시 그 역할을 맡기로 하였다. 어머니가 부탁한 것은 확정적 의미의 백혈병이 아니, 아주 조금 의심된다는 말의 백혈병으로 말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전에 혈액종양내과 선생님과 상의한 결과, 추가적인 골수검사 등 정밀검사 및 치료 과정을 고려할 때, 서울 쪽 혈액 암 전문병원으로 가는 것을 추천해 주셨다. 단호하게 확정적인 단어로 청년에게 말해버리면 아직 복부 수술 후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안 좋은 영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번 청년 어머니와 둘이 앉았던 그 자리, 같은 모니터를 보면서 셋이 앉았다. 마찬가지로 처음 CT, 이후 여러 번 X-ray 순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잘 회복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처음 수술 당시 배 안에 1리터 이상 피가 고여있으면 여러 장기 손상이 심했다는 말도 함께 말했다. 그러나 청년이 평상시 튼튼하고 건강하여서 큰 수술도 잘 이겨내고 지금 잘 회복하고 있다는 말도 함께 하였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어금니를 한번 찡긋 깨물고 다시 말한다.
"백혈구 수치가 조금 높아서 이상합니다.
여기서는 정밀 검사가 어려워서 서울 쪽 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권해드립니다."
청년에게는 '백혈병'이라는 단어를 빼고 말했다.
옆에 어머니는 나와 아들을 동시에 보면서 눈물을 참고 있다.
며칠 지나 청년은 퇴원하였다.
정확히는 전원이다.
나는 전원의뢰서에 정성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다.
'교통사고로 복강 내 출혈, 소장 천공, 장간막 손상으로 응급수술하였습니다.
혈액검사 상 백혈구 증가 소견으로 백혈병 의심됩니다. 정밀검사 의뢰 드립니다.'
[ 자세한 의학 용어들을 더 빼곡히 썼지만 대략 내용은 이렇게 썼다.
글자로 적지는 못하였지만...
'착한 청년 환자와 사랑으로 돌보는 어머니, 보호자가 있습니다.
더 잘 치료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이렇게 마음을 담아서 적었다.
청년이 잘 치료받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